온통 죽음이, 여러 명의 ‘목숨이 끊어졌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참사가, 아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집단 학살이라고 해야 할 재앙이 온 사회를 검게 뒤덮었던 날들이 흘러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술이라도 취해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벌놈아 비겁한 놈아’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가도, ‘모두 병 들었는데 나만 아프지 않아서’ 고개 떨구기를 반복했던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고 후 며칠 동안 어느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고, 무기력했으며 무능했던 정치인들이 다시 확성기와 현수막을 들고 ‘국민 안전’이니 ‘안전한 사회’를 운운하며 거리에 등장했을 때는 그들의 뻔뻔함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과 절망, 분노와 울분이 시간이 갈수록 깊은 회의와 허무함으로 변해 침잠하고 있을 즈음 나는 또 다시 가까운 친족의 부고를 들어야만 했다. 고인은 일제강점기 상고까지 나온 엘리트였으나, 부모를 모시고 형제를 거두겠다는 책임감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언덕배기 땅뙈기에 고추나무를 심고 고향을 지켰던 평범한 촌로였다. 가정에서 그는 배우지 못한 늙은 아내를 무시하거나 타박한 적이 없었던 따뜻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의 오래된 시골집 대문에는 수 십 년 전부터 그와 그의 아내의 낡은 문패가 나란히 걸려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논리로 막힘없이 대화할 줄 아는 명석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유익했으며 때로는 그의 명료함에 적잖이 당황도 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와의 마지막 대화도 미래사회에 관한 것이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수명의 연장과 저 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생산인구와 부양인구간의 격차 따위의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생명공학과 우주개발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니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여러 지병으로 기력은 쇠해졌지만 정신은 맑았던 그는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하는 자식들의 말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초라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날도 예약된 진료를 취소하고 마당 한 편에 있는 창고에 걸음 했다가 발을 헛딛고 넘어져 ‘밥도 못 잡숫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평소 메모하기를 좋아해 수권의 두꺼운 노트를 남겼다. 노트에는 그가 겪었던 일상의 일과 고전에서 발췌한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글귀들,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보타주’ 나 ‘호모포비아’와 같은 외래어나 전문용어를 풀이해 놓은 글들이 반듯한 글씨로 빼곡히 차 있었다. 컴퓨터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그와 같은 글들을 메모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앎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성실함에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 반듯했던 글씨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리저리 삐뚤빼뚤 틀어져 겨우겨우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서둘러 책장을 덥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숨을 참아가며 힘겹게 써 내려간 ‘유서’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유족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싣는다. “아들 딸들 아비가 보호하지 못해 미안하다 마곡댁 60년 그동안 고생 많았네 미안하네 건강관리 잘해 사는 게 하루가 지겨워 OO아 어머니 잘 모셔라 형제간에 우애 잘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정의롭게 살아라 오- 슬프다”

하관(下棺), ‘징그럽게 라디오만 듣고 살았시야’ 할머니의 청에 따라 손바닥만 한 라디오가 그의 머리맡에 놓이고, 딸들의 울부짖음이 흩뿌려지는 흙과 함께 낭자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뭐든 나누고 살았던 그에게 동네사람들은 조촐한 노제를 열어주었고, 꽃상여를 메고 산길을 오른 상여꾼들과, 땡볕에서 봉분을 다져 올린 나이든 일꾼들은 노임을 받지 않았다. 거대한 죽음과 온갖 부조리와 부정의 앞에 나는 다시 오늘을 생각한다. ‘사회에 봉사하고 정의롭게 살아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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