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온 여러 문장의 흔하면서도 거대한 소재다. 유년의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의 문지방에 선 21살, 감회를 서술한다면 '아, 이 초록의 계절에 성년을 맞이해서 설레고 또는 순수했던 유년이 지나가서 슬픈' 뭐 이런 식의 내용이 나오곤 하는데, 이런 내용은 일기장에서도 피할 일이다. 아까운 나무 다 죽는다.
사고(思考)는 인간특유의 기능이다. 단순하게 사는 것에는 한 표 줄 용의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단순하게 사고하는 것에는 '짝' 소리도 아니 내겠다. 성년의 날은 삶의 전환적 성격을 지닌 중요한 날이다. 그런 단순한 감상에 치우친 생각보다는 며칠 수업을 빼먹는 한이 있어도(!) 머리를 싸매고 뒹굴, 딩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 뭐에 대해서?
독재자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아이가 본래적으로 가진 약한 이미지를 이용, 민중과의 친근감을 증폭ㆍ극대화하려는 행동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기존체제의 존속과 기득권 유지에 있다. 아이의 독재 이전에 대한 기억의 부재(不在)와 순수(純粹)는 언제라도 그러한 체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순수. 일단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위험한 순수다. 단순한 논리구조 앞에서도 여지없는 모래성이 바로 아이의 순수성이다. 이는 독재자에게 더 없는 매력이다. '기억 없고 순한 동물들'을 길들이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갑자기 독재자 운운 하니까 나조차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뜬금 없는 소리가 아니다. 21년의 시간이 밥그릇 수 채우기가 아니라면,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노릇이다. 말하자면 아이의 그 위험한 순수성 부러워하지 말고 그동안 열심히 키운 자신의 '머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공부 열심히 하란 소리는 아니다. 공부, 특히 제도권 교육의 정점에 서있는 대학공부는 직업 훈련의 의미가 강하다. 일종의 마무리 단계라고나 할까? 간판습득과 세상적응력습득의 거대하고 유용한(?) 기술들 사이에서 이미 '진리탐구'는 레테의 강을 건너고 있다.
진리탐구. 내가 했지만 참, 실소를 참을 수 없는 말이다. 밑도 끝도 없이 '진리탐구'라니, 어디선가 곰팡이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차렷. 진리탐구는 결코 형이상학적인 철학탐구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진리탐구는 '길들여지지 않는 방법 모색'의 다른 이름이다.(이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진리탐구란 말은 지워버리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成人)이다. 성인이라면 '이루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일 텐데, 인격완성이 이루어진, 뭐 이런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신념의 이룸'이라고 그 의미를 대신하고 싶다.
신념은 꿈으로 대변되는 희망사항일 수도 있고 나름의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념, 특히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수동적 신념이 판을 친다. 물론 선택은 자신이 한다. 나는 선택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무슨 가당찮은 소린가. 지금 당장 이 글을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문제는 제조에서 진열까지 일련의 '신념제조과정'이다.
이전에 약간 독재를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가 콕 찍어 '독재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도(高度)의 독재기술 시대'라고 고치면 동의할 수 있을까? 어쨌든 과거 독재의 형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건 눈에 보이기라도 했으니까. 이제는 알기도 어렵고 마찬가지로 싸우기도 어렵다. 반면에 길들여지기는 너무나도 쉽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재에 항거하던 청춘들이 이제는 갈팡질팡한다. 무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고도의 독재기술이란 말인가. 인용해야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언어학자. '미국의 양심'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미국을 비롯한 현대문명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세력이다)는 현대소비사회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현대의 가장 쉽고도 저항 받지 않는 독재방법으로 '소비'를 들었다. 소비가 그것의 전부는 아니지만 확실히 우리는 TV나 다른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극심하게 받고 있다. 미디어는 이 시대의 신념제조공장이다. 매스미디어의 언어는 소통을 지역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불통으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사고(思考)를 재단하고 주입한다. 따라서 깊이의 사고가 사라진다. 거기서 제시한 상품- 어떤 형태로든, 무엇을 위해서건-이 선택의 전부인양 다뤄지고 있고, 사고의 깊이가 얇아진 만큼 약해진 비판의 정도로 인해 길들여짐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내버려둔 '물론과 당연의 세계'다. 당장은 적응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은 '당장'으로 끝이지 결코 '계속'이 될 순 없다. 언제 물론과 당연의 세계가 상처와 눈물의 세계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살아있다면, 움직여야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움직임'은 '일탈'? 아니, 일탈은 말 그대로 일탈일 뿐이다. 개인적 일탈은 사회체제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 오히려 체제 안에서 역이용 당할 가능성조차 내포하고 있다. 지금은 일탈이 아니라 투쟁을 이야기할 때다. 투쟁이라는 말이 가진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거창한 게 아니다. 당장에 앞에 놓여있는 자신이라는 틀부터 깨나가는 것도 투쟁이다. 자신부터 만들어지고 길들여진 껍데기라면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는다.
이발소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유유자적하는 그림이나, 보기에도 먹음직한 돼지가 떡-하니 모로 엎어져 있고 제 젖꼭지 수보다도 많은 새끼를 먹이고 있는 그림들을. 평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답답할 때가 많다. 과연 평화는 잘 먹고 잘 살자인가. 물론 먹고사는 일은 인간의 필수요 기본권이므로 내가 왈가왈부할 성격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떠들어대는 건 무슨 배짱인가? 이유는 하나다. 더불어, 함께, 살고 싶어서다.
나는 오늘 이 땅에서 반(反)시대적 성년식을 꿈꾼다. 식은 '형식'과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주체는 언제나 자신이다. 자신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항상 혁명을 생각해야한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 위에서 가능하다. 일방적인 정보에 목말라 하지 말고 자신과 세상의 소리를 들어 보라. 고민할 수 있는 책과 예술이 억압된 매트릭스로 가는 길을 지워줄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는 삶이 그 모든 것이며 진정한 성인의 삶이다. 이제, 시작이다.

용봉문학회 김청우(국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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