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과 받는데 제가 왜 도망 다녀야 해요?”

▲ 감독=이수진(사진=무비꼴라쥬 제공)


영화 속 피해자 한공주가 ‘가해자가 미안해 하고 있으니 봐달라는 탄원서를 부탁하는 경찰에게 한 말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관용을 요구하는 장면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영화 ‘한공주’는 2004년 44명의 고등학생에게 1년간 성폭행을 당한 ‘밀양 여중생’을 모티프로 한 영화다. 당시 ‘밀양 여중생 사건’의 가해자는 모두 전과기록 없이 풀려났다.

가해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반면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는 항상 피해 다녀야한다. 가해자부터 가해자 가족들, 주변 사람들의 ‘여자도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따가운 시선까지 피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피해자의 인권은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영화는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던 공주의 인생은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완전히 달라진다. 죄인인양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사람을 경계하고 새로 살게 된 집에서 짐도 풀지 못하고 매일 떠날 준비를 하며 지냈다. 공주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은 피해자만 손해인 세상이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성폭행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평생 24시간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느낌이라고 묘사한 공익광고가 떠올랐다. 행복해서 웃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 심지어는 관에 누워있을 때도 뱀은 온몸을 감고 기어 다녔다. 이 뱀은 공주가 간신히 꾸려가는 일상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공주가 새로운 사람들에게 겨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때 가해자 학부모들이 단체로 찾아와 합의를 해달라며 공주를 괴롭힌다. 피해자인 공주는 결국 공주는 또 그 사람들을 피해 숨고 도망가야 했다. 결국 공주는 집에서 나와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엔딩에서 “왜 수영을 배워?”라고 묻는 친구에게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봐.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라고 답하는 공주.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공주’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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