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말은 내게 조금 색달랐다. 색다른 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말이 가까워 올수록 도시의 불빛은 더 크게 반짝인다. 빵집에는 케이크 상자가 한 가득이고 거리에는 캐럴이 흐른다. 이런 풍경과는 조금 대조적인 곳을 지난 24일 찾았다. 천연 자연색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반짝이는 도시를 벗어나 나는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길곡리 왈길마을에 갔다. 이 마을은 2002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마을 숲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 남원 왈길마을의 355년 된 느티나무.

마을 한 가운데 355년 된 느티나무

광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요금은 5200원. 1시간 10분 정도 가면 남원에 도착한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왈길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251번. 버스는 2~3시간 간격에 한 대씩 있었다.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서 우선 밥을 먹었다. 남원은 추어탕이 유명하다지만, 내가 선택한 메뉴는 ‘오리육개장’이었다. 육개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터미널 주변을 빙빙 돌다 천변을 만났다. 요천이었다. 멋진 갈대와 함께여서 그런지 더 멋졌다.

기다리던 251번 버스가 왔다. 약 14개 정류장을 지나치자 왈길마을에 도착했다. 요금은 1,150원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였다. 겉만 봐도 정말 오래된 나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지는 넓게 꺾여 자라 그 무게를 받쳐 주는 지지대에 기대어 있었다. 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 의하면 이 나무의 나이는 355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무는 1982년 9월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 앞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었다. 왈길마을 숲도 멀지 않은 거리에 보였다. 겨울이라 잎은 모두 떨어지고 없었다.

▲ 멀리서 본 왈길마을 숲.

마을사람들의 든든한 휴식처

숲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 주인이 없는 듯 보이는 집 마당을 둘러보기도 했다. 논·밭길을 지나 숲에 도착했다. 멀리에서나, 도착해서나 느낀 부분이지만 숲이라고 하기는 그 크기가 크진 않았다. 높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각자의 자태를 뽐내며 듬직하게 서있었다. 듬성듬성 여러 그루 자리한 것이 멋스러웠다.

사복사복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나무 사이사이를 지나쳐 갔다. 그러자 가까이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반기는 것도 같았고, 집 주인에게 낯선 사람이 접근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개를 진정시키자, 이번에는 닭이 눈에 들어왔다. 장닭 세 마리가 나무 아래 모여 바닥에 부리를 빠르게 댔다 땠다 했다. 닭들에게도 대화를 시도했지만, 가까이 다가서니 어디로들 가버리고 없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크고 두껍고 높았다. 잎이 모두 떨어져 있었지만 강해보였다. 꼭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무들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나무 옆에 있는 오래된 낮은 의자에 앉았다. 나무들을 찬찬히 올려다보는데 바람이 불었다. 손이 시려왔다. 마을은 내내 조용했고, 온도는 느끼기에 적절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꼭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이 큰 나무들에 풍성한 잎이 열리는 것을 상상해보니 이곳의 봄·여름은 더 근사할 것 같았다. 사계절 내내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안식처이자 휴식처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을에 같이 온 후배는 나무 주변 운동기구에 누워 약 5분간 하늘과 나무를 동시에 봤다.

▲ 나는 이날 나무와 대화를 나눴다.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눈이 녹은 자리, 녹지 않은 자리가 규칙적으로 보이는 마을이었다. 주변은 산이 삥 두르고 있었고, 곳곳에 밥 짓는 연기가 공기에 색을 더하고 있었다. 숲에서 벗어나자 해가 지려는 듯 아름다운 색이 하늘에 칠해졌다. 주황색으로 물든 마을에는 집집마다 메주가 걸려있었다.

논길을 지나는데 멀리서 마을 할아버지가 우리를 유심히 지켜봤다. 아무래도 ‘낯선 이들이 여긴 무슨 일인지’ 궁금하셨던 것 같다.

“어디서 왔어?”

마을을 둘러보는데 약 3번 정도 들었던 말이다. 담장이 낮은 집 마당을 그냥 보기도 했고 까치발로 흘깃흘깃 보기도 했다. 길에 떨어진 나무를 줍고 계시는 한 마을 할머니는 “예쁜 아가씨들이 여긴 웬일이여, 그쪽으로 가면 길 없어. 일로 가야제”라고 일러주시기도 했다.

전봇대에 열린 오래된 수세미 3개를 보며 “어떻게 저기에 걸려있지?”하고 토론(?)을 하던 차, 집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광주에서 왔고, 여기 마을이 예쁘다고 해서 놀러왔다”고 하니, “누구 집 손주들인가 궁금해서 나와 봤다”며 “추우니 마을복지회관에 가서 몸 좀 녹이다가 버스 오면 타고 가라”고 하셨다.

▲ 왈길마을 숲에서 닭 3마리를 만났다.

마을을 2바퀴 돌았다. 반대방향으로 다시 둘러보면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버스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서야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느티나무 뒤에는 마을 복지회관이 있었다. 

복지회관에 들어가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3분이 계셨다. 할머니들은 “어서들 오라”며 “배는 고프지 않냐”고 앉자마자 팥죽을 내주셨다. 덕분에 나와 후배는 팥죽 한 그릇을 그 자리에서 뚝딱 비웠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고 물으시기에, “나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하니, “잎이 나면 더 예쁘다고 그때 또 오라”고 하셨다. 100세가 넘으신 할머니도 있었고, 100세에 가까워 온 할머니도 있었다. “우리 손녀들 같다”며 “여기서 자고 가도 되는데…” 하셨다.

오후 5시 50분이 되니 버스가 빨간 불빛을 반짝이며 마을로 들어왔다. 할머니들은 “얼른 가보라”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하셨다. “잘 먹고, 잘 쉬다 간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버스에 올라타고서도 한참 우리 쪽을 바라봤다.

버스를 타고 왈길마을을 벗어나는데 날이 어둑어둑 했다. 할머니들이 챙겨준 떡 4개를 후배와 2개씩 나눠먹었다. 그러던 중 버스 안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그제야 왈길마을에 있었던 날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별한 곳에서, 잊지 못할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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