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모여 담소·체조·노래…“집보다 이곳이 더 좋아”
일본 만행 잊지 않기 위해 재일조선인 신분 포기 하지 않고 사는 할머니들

▲ 에루화의 재일조선인 할머니와 자원봉사자가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낯선 교토의 한 주택가 사이에 반가운 우리말이 눈에 띤다. 하얀 간판에 알록달록한 글씨. 그리고 그 간판을 달고 있는 가정집 같은 느낌의 작고 아담한 2층짜리 건물. 한눈에 이곳이 한인들과 관련된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재일조선인 밀집지역인 교토 히가시구조에 위치한 재일조선인 노인복지시설 ‘에루화’다. ‘에루화’란 노래할 때 흥이나 즐거움을 나타내는 순우리말 감탄사이다.

“집보다 이곳이 더 좋아”
할머니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는 넓은 방에 들어서자 흥겨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활기찬 분위기가 취재진을 맞이했다. 오후 간식시간, 봉사자들은 음료와 다과를 내왔고 할머니들은 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즐겼다. 봉사자들 역시 연신 웃는 표정으로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주거나 거동을 도왔다.

간식시간이 끝나자 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남성 봉사자가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며 할머니들을 불러 모았다. 오후의 체조시간이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활기찬 구령에 맞춰 체조 동작을 선보이는 봉사자를 할머니들이 열심히 따라했다.

체조시간을 마치고 등장한 건 마이크와 장구. 체조시간을 이끌었던 봉사자가 장구 연주에 맞춰 노래 한 곡을 불렀고 할머니들에게도 차례차례 마이크가 넘어갔다. ‘아리랑’, ‘도라지타령’, ‘목포의 눈물’ 등 친숙한 우리나라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몇몇 할머니들은 흥이 나 어깨춤을 추었다. 우리나라의 노인정의 모습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이렇듯 에루화는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이 한 식구처럼 모여 지내며 한국적인 문화를 즐길 수도 있는 곳이다. “에루화 사람들은 모두 한 식구다”는 김도대 할머니(78)는 “혼자 사는 집보다 이곳(에루화)이 더 즐겁고 좋다”며 웃었다.

상처를 덮어준 한마디 “안녕하세요”
에루화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계열의 동포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지난 2000년에 세운 비영리법인 기관으로, 재일조선인 1, 2세대 할머니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으로 건너와 살면서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졌다.

노인들을 위한 일본의 사회적 혜택 중 대표적인 것은 ‘개호보험’인데, 스스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실시하는 간병보험 시스템이다. 하지만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은 일본의 사회제도에 어둡고 혹은 알더라도 글을 몰라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재일조선인인 에루화 사무국장 남순현 씨(47)는 “일본인들과 똑같은 의무는 수행하면서도 개호보험과 같은 혜택은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인 1세들을 위해 2세들이 나섰다. 그렇게 세워진 곳이 바로 에루화다”고 설명했다.

개호보험을 누리지 못한 것만이 재일조선인 1세들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그들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한국인이라며 교실 뒤에 서있으라고 했다”, “김치냄새가 난다고 놀림 받았다”는 강정순 할머니(80)의 말처럼 그들은 그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꽃다운 나이인 15~17세에 얼굴도 모르고 일본인에게 시집을 간 할머니들도 많다. 차자순 할머니(80)는 어린 나이부터 일본인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하다 일본인에게 시집을 갔지만 쫓겨났다. 어머니를 찾으러 한국에도 가봤지만 헛수고였다는 차 할머니는 “일본으로 돌아가던 날 한국에 있던 친척들이 배웅을 나왔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라”며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할머니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김 할머니는 한국에 간 날 밟은 흙내음을 ‘한국의 냄새’로 기억한다. 그 냄새에는 “어머니와 시장까지 가는 먼 길을 걸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비 오는 날 대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던” 추억들이 오랜 세월에도 흐려지지 않고 오롯이 간직돼있다.

일본인들의 멸시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리던 할머니들은 한 때 마음의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닫힌 마음의 문은 입마저 닫게 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역시 사람이 치유했다. 남 씨는 “에루화에 처음 들어오신 할머니들 중 일부는 말씀을 하지 않아 실어증을 앓고 있는 줄 알았다”며 “하지만 우리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들도 입을 여시더라”고 말했다.

한국말을 쓰면 어디서나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았던 할머니들은 에루화에 오고부터 한국말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이곳에 오고부터 인생이 변했다”는 차 할머니의 말처럼 에루화에 들어오고 나서 할머니들의 마음이 열리고 인생 또한 변한 것이다.

힘겹지만 당당하게, 나는 나다
이처럼 에루화는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힘들게 살아가느니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재일조선인들에게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조선국적은 곧 북한국적’이라는 인식 때문에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들은 한국과 일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더욱 경색된 남북관계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면 일본인으로 국적을 바꿔 일본 사회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고 살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에게 국적 전향을 제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그에 따르지 않았다. 차 할머니는 “일본 국적을 얻으면 지금껏 일본에서 겪었던 아픔을 잊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신분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자 자존심이다. 그리고 그들은 국적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길 원한다. “국적을 떠나 ‘나’는 ‘나’ 자체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남 씨의 얼굴에는 쓸쓸하지만 꺾을 수 없는 강인함이 비쳤다.

‘서로 도우며 산다’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이 적은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이 택한 삶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하며, 도우며 사는 것이었다. 실제로 에루화는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할머니들 집에 직접 도우미를 파견해 생활을 돕거나, 장애자·다문화가정·육아 지원 등 다양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인지 에루화 2층의 사무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서로 도우며 산다’는 문구가 적힌 액자다. 단순하고 짧은 글귀지만 에루화를 한 마디로 나타내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오늘도 그들은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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