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유골함을 손에 든 채 시골에 사는 아버지가 올라온다. 그 유골함 속의 주인은 3일전 살해당한 고모. 아버지는 나에게 고모의 집 정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고모의 방안은 쓰레기통인지 사람 사는 곳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끔찍하게 더럽다. 방안을 청소 하던 중 기모노를 입은 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쭉 내민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고모의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나는 궁금증에 이끌려 고모의 과거행적을 쫓기 시작하고, ‘혐오스러울’ 만큼 불행한 삶을 보낸 고모의 일생이 펼쳐진다. 

음악이 함께하는 뮤지컬 영화이기도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밝을 때는 한없이 밝다가도 끔찍한 장면이 나올 때는 한없이 끔찍해지는 극적인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상반된 영화분위기와 비극적인 결말은 관객들의 슬픔을 증폭시켜 ‘울컥’하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보면 나 자신이 슬프고 불행한 일생을 살고 있다는 심란한 마음이, 나보다 더 불행한 마츠코를 보며 조금은 누그러지기도 한다.

이렇게 남의 불행이나 비극을 보며 이상하게도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변태 같은 경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정의했다. 카타르시스가 단순히 고대인의 이론적 상상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극적인 영화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는 만든다는 <사이언스 데일리>의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소개했다. 비록 남의 불행을 통해 나의 행복을 찾는 카타르시스가 상당히 이기적인 도피처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죽도록 위로받고 싶을 때, 주변사람들을 통한 카타르시스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마츠코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의 불행을 통해 행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전대신문>이 ‘□한 당신에게’를 3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다음 호에는 ‘머리가 복잡한 당신’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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