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오월의 광주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를 개작한 노랫말에 전남대생 김종률이 곡을 붙여 완성된 노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때 합창이냐 제창이냐의 논란 끝에 파행적으로 진행 된 행사...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시작을 똑똑히 목격한 시민 아니 민주 대학생(전남대 의예과 2학년)의 한 사람으로 그 날을 회생해 본다. 80년대를 열어주는 엄청난 사건은 79년 10월 26일이었다. 박정희대통령 서거로 인한 유신정권의 몰락. 학교는 모두 휴교였지만 3월을 맞았을 때는 드디어 대학에서 합법적인 집회를 할 수 있게 됐다. 4월 들어서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12·12사태의 내막을 알고 더 이상 전두환을 비롯한 군인출신의 쿠데타세력에게 정권을 내 줄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유신시대가 얼마나 끔직한 시대였는지, 토론하고 노래하고 집회를 열었다. 광주도 뜨거운 민주화의 봄이 열렸다. 박관현 학생이 의례적으로 광주고 출신으로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강력한 지도력으로 학생들의 의지를 모았고, 의대학생까지 참여하여 ‘전두환이 물러가라~물러가라~’를 수없이 외치며 도청분수대를 거점으로 하는 횟불집회를 5월 16일에 열었다. 5월 18일 일요일 아침 10시경, 의과대학 동아리 상록회 축제 연극연습을 하려고 학동캠퍼스에서 갔는데 군인이 출입을 통제하였다.

전날밤 전국으로 확대되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동료들과 함께 근처 도청 앞으로 나왔더니 학생들, 시민들이 시위진압 전투경찰과 대치중이었다. 이미 용봉동 전남대정문에서 계엄군과 충돌해서 부상자가 나왔다고 술렁대고 있었다. 일부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다 전투경찰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를 보고 있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야유와 민주구호를 제창하며 마침 금남로지하상가 공사로 쌓여있던 벽돌과 돌맹이를 주어 최루탄을 남발하며 곤봉을 휘두르는 전투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한나절 진행됐던 시위를 마무리하고 당시 대인동 광주고속터미널 앞 친척집에 있었다. 마침 감기약을 사러 골목길 앞 약국에서 올 때 한무리 군인들이 광주일고 사거리에서 트럭을 타고와 내리더니 지나가던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시민을 향해 돌격하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하다못해 발로 짓 밟는 것을 목격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오니 일고여덟명 시민들도 망연자실하여 마루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당탕탕하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걸어놓은 나무대문을 계엄군들이 ‘펑’ 차고 들어오더니 가만히 앉아있던 사람들을 마구 구타하였다. 마침 방안에 있어서 봉변을 피했고 데이트 왔던 아가씨와 총각은 큰 낭패를 봤다. 뒤쪽 목욕탕까지 끌려가 얻어맞아 피투성이 된 총각은 사정 끝에 잡혀나가는 것을 모면했고 아가씨도 표현할 수 없게 옷이 찢기는 망신창이가 되었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광주는 분노와 정의의 힘으로 민주화 운동의 싹을 키웠다.

해마다 5월 18일이 되면 정치꾼들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며 순수한 뜻을 받들어 어쩌고 저쩌고~`한다. 당신은 그때 무엇을 하였고 목청껏 민주화를 한번이나 외쳤던가 묻고싶다. 종편 TV에서 ’북한군 잠입으로 인한 폭거일이지 모른다~`라고 씨부렁대던 정체모를 탈북자와 대꾸하던 아나운서는 과연 광주민주화의 ‘ㄱ’자라도 알고있는 가? 몇 가지 거짓에 사실을 섞어 말하여 거짓과 사실을 구분하기 어렵도록 하는 진실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아직도 역사적 평가에서 흠집을 당하는 광주민주화 운동은 전두환정권의 도덕과 정통성에 타격을 주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이루어지는 초석이 되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더 이상 논란의 대상에서 벗어나 숭고한 광주민주화의 뜻을 기려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