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0대 20대들은 서로의 지역적 연고에 상관없이 경상도 출신의 손예진을 좋아하고 전라도 출신의 수지를 좋아한다. 영·호남의 치열했던 지역감정은 구세대의 유물 일 뿐 더이상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선거철이 지나고 언제부턴가 한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다시금 지역감정이 분노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파 포탈의 중심이라 불리는 ‘일베인’들에게 호남인들은 극단적인 혐오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전라도인은 대한민국 내의 유별난 종족이고 비난의 대상이다. 전라도인은 이기적이며, 사람들의 신뢰를 쉽게 저버리고(시쳇말로 뒤통수를 친다고 표현한다.) 허무맹랑한 좌파적 성향의 이념으로 북(北)을 추종한다.

만약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 ~ 1985)가 살아있다면 그는 한국의 지역감정을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국가나 정치적 집단은 항상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범주로 자신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유지해 나간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편 가르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너와 나, 우리와 너희의 경계 짓기는 인류사 갈등의 원천이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종교 갈등, 코소보 사태의 인종갈등, 터키-쿠르드족 민족갈등, 아프리카의 부족갈등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이념 갈등, 또 남한 안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지역을 경계로 갈등을 겪고 있다. 적과 동지로 나뉘어 충돌하는 서로의 옳은 당위는 여러 가지 오해와 편견을 만든다. 각자가 내세우는 ‘이성적 합리의 근거들’로 서로의 말꼬리를 잡으며 대화하고, 더 이상의 소통을 포기하게 되면 짜증과 분노의 감정으로 전이되어 결국 폭력으로 다다른다.

경상도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호남 출신은 이기적이라는 성급한 일반화 역시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조작되고 학습된 피해의식 일 뿐이다. 사실 인간은 대상을 먼저 싫어하고 여러 근거를 가져다 붙이는 경향이 있다. 마치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얼추 끼워 맞추며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페루 원주민의 경우 부족의 100%가 O형이며, 혈액형 성격론은 일본판 선데이 서울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심심풀이용 심리 상담이었다.) 이처럼 지역감정은  학습되고 세뇌되어 쉽게 전념되는 일종의 편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지역감정을 유발한 적과 동지의 프레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까? 단어 그 자체를 두고 생각해보면 정치적 범주인 적과 동지 중 하나의 개념을 해체해 버리면 된다. 동지를 해체시킨다면 너와 나 모두 적이 되므로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적의 개념을 해체시키는 방법을 떠올려야한다. 즉, 서로의 우리(동지)라는 테두리를 더 넓게 확장 시켜야 한다. 한국인이라는 넓은 개념, 또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인문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소통이 아닌 각자에 대한 가치판단이 먼저 작동하게 되면 서로 간의 갈등 구조는 폭력으로 전개될 뿐이다.

현재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영·호남 교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학기 동안 전남대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처음 학교 캠퍼스를 거닐며 5.18민주항쟁을 그려놓은 커다란 사범대 벽화에 놀라고, 전라도 음식 맛에 두 번 놀랐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영남인이든 호남인이든 우리 모두는 한반도에 사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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