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수업도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이 조별로 실습하는 것을 약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실습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불안함과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약간의 거리감을 둔 채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저 학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맞다. 난 강사였다.

방학이 되면 다음 학기를 위해 시간강사조서라는 서류를 제출한다. 서류는 행정직원에게는 하나의 일상적 서류일 뿐이지만 강사들에게는 자신이 강사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알림이다. 나에게 다음 학기 강의는 단 한 강좌만 허락되었다. 이때 ‘허락’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강의는 배정되는 것도, 계약되는 것도 아니라 ‘허락’된다. 힘의 차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 어떤 대상에 의해-전지자와 같은- 고맙게도 허락되는 것이다.

나는 그 허락에 의문을 품어보았다. 교수회의에서 정해준 기준은 이러했다. 3년 이상 강의를 한 자는 안 되고, 외부에서 일을 하는 자는 안 되고, 박사논문을 쓰지 못한 자는 안 되었다. 그 기준은 한 편으론 순수함과 온정을 가지고 있다. 새롭게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졸업생과 외부에 다른 직업이 없는 자들의 생계를 걱정한 것이다. 비록 내가 그 기준에 의해 배제되었더라도 교수회의의 순수함과 온정의 절대성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나는 올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제자들과 또 하나의 수업을 한다. 그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할 것이다. 그리곤 대학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볼 것이다. 동기도 없고, 후배도 없고, 선배도 없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는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강사들은 대학이라는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보와 미안함과 고마움도 나누지 못하는 야생의 법칙을 배워야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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