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Q.
100여 년 전에 태어난 루쉰의 아Q는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들 속에 살고 있다. 아Q가 생존을 계속하며 후손을 낳아 번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집과 이기적 자아의 껍질에 싸여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Q정전>은 1921년에 발표된 루쉰의 중편소설로 제국주의 침략으로 거의 식민지 상태나 진배없었던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루쉰은 날품팔이꾼 아Q를 내세워 변화의 폭풍에 휘말려 있는 당시의 중국에서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이 거만한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채 무기력하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중국 민중을 질타하고 있다.

하지만 루쉰의 <아Q정전>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읽어도 재미있다. 그 이유는 빼어난 묘사로 아Q라는 전형적인 인물을 잘 그려낸 까닭이다. 그래서 100여 년 전에 출생한 아Q가 현대무용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새롭게 재탄생해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는 것.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두 명의 아Q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신해혁명(1911년) 직후의 중국에 살았던, 중국 민중의 전형으로 창조된 아Q이고, 또 하나는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으로서의 아Q다. 의사였던 루쉰이 매스를 버리고 선택한 붓으로 중국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창조해낸 아Q를 만나려면 아Q를 낳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암울한 중국

루쉰의 삶을 관통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중국은 암울한 시대였다.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정치, 사회적 혼란이 심해져 중국 민중은 생존 자체가 힘겨웠다. 드넓은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들의 잔칫상이었고, 봉건적인 폐습에 젖어 있는 민중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희망의 불씨를 일궈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신해혁명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최초로 공화제를 수립, 중화민국을 세웠지만 이마저 서구열강을 등에 업은 위안스카이 정권의 등장으로 반제국주의, 반봉건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다.

신해혁명의 성공 뒤 북경의 교육부에서 일했던 루쉰은 기대를 걸었던 혁명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좌절하자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중국사회와 중국사상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열정적으로 해나간다. 1921년 세상에 나온 아Q는 바로 중화사상에 기반을 둔 공허한 영웅주의와 자기만족, 그리고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정신적인 만족에 심취해 현실을 외면해버리는 우매한 중국민족 자체였다. 루쉰은 중국 민중이 아Q를 보면서 각성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길 절절히 염원했다.

▲ <아Q정전>을 쓴 루쉰.

‘어리석은’ 아Q의 비극적 죽음

일정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날품팔이 아Q. 사람들은 아Q를 바쁠 때는 기억해냈지만 한가해지면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린다. 아Q의 이름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은 사뭇 희극적이다. 이렇게 하찮은 인물의 이야기에 거룩한 위인에게나 어울릴 ‘정전’이라는 제목을 쓴 것 자체가 그렇다.

머리에 부스럼창이 나 있는, 허드렛일로 겨우 먹고사는 아Q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에도 자존심 강한 특이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신기한 묘법이 있었으니, 아무리 명백한 패배도 그의 정신만 거치면 승리로 뒤바뀌었으며, 어떠한 고난도 그의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고,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었다.

그런 아Q지만 처음으로 인간적 절실함이 묻어나는 일이 생긴다. 정수암의 젊은 비구니의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성적 욕구가 생긴 아Q가 짜오 어른 댁의 우마에게 구애하는 장면이다. 에피소드 전체에서 유일하게 아Q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결국 이 일은 아Q의 생존을 위협, 성내로 떠나게 한다.

그렇게 웨이주앙에서 사라졌던 아Q는 그해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다. 정신적 승리 법으로 대표되는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이 세상에 대한 약삭빠른 변신으로 발전한 것이다. 도둑질로 얻은 부를 교묘하게 숨겨 상인으로 성공한 것처럼 꾸민 아Q는 혁명이 가진 힘에 반해 혁명에 가담하려 한다. 하지만 이마저 거부당하고 결국에는 대갓집의 폭도로 오인 받아 사형에 이르고 만다. 사뭇 엽기적이어 보이는 희극적인 행적을 보여온 아Q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 살려!” 하는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간 아Q. 처음부터 끝까지 희화화된 아Q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대단원을 맞는다.

▲ 루쉰, <아Q정전>.

무엇이 아Q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가

아Q의 일대기를 따라가 보면 아Q의 비극적인 최후는 일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아Q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죽음조차 그와 무관하게 그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다 비로소 무시무시한 ‘늑대의 눈’을 떠올린다.

“사 년 전에 그는 산기슭에서 굶주린 늑대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늑대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한없이 그의 뒤를 따라오며 그의 고기를 먹으려고 했다. (중략) 그 늑대의 눈은 영원히 기억에 남았다. 흉악하면서도 겁을 내는 그 눈은 두 개의 도깨비불처럼 빛나면서 멀리서부터 그의 살가죽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또,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더욱더 무시무시한 눈을 보았다. 둔하면서도 예리한 그 눈은 이미 그의 말(語)을 씹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육신 이외의 것들을 씹어 먹으려고 하면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영원히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 눈들은 하나로 합쳐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그의 영혼을 물어뜯는 것이었다.”

아Q의 삶을, 존재를 물어뜯을 듯 차갑게 바라보는 늑대의 눈, 그것은 다름 아닌 아Q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눈이었다. 아Q의 일대기는 결코 동정 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어느 누구도 아Q에게 돌을 던질 만큼 떳떳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아Q의 비극적 최후는 너무도 당연한 것일까? 아Q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든 것은 비단 ‘정신승리법’으로 대변되는 아Q 자신만의 탓일까?

물론 가장 큰 요인은 아Q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풍자적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어리석음은 기가 막힐 정도다. 하지만 또 다른 요소를 찾는다면 하나는 지배계급 인물들이 가하는 박해다. 아Q가 생계의 위협을 받은 것도, 다시 돌아와 번성기를 누리는 듯했으나 금세 추락하는 것도, 강도로 몰린 것도 모두 짜오 어른 때문이었고, 혁명을 금지당한 것은 가짜 양놈 때문이었다. 아Q의 모든 가능성은 그들의 손에 의해 차단당한다.

두 번째 요소는 같은 민중이면서 앞장서서 아Q를 박해하는 주위 사람들이었다. 우마 사건 이후 웨이주앙 주민들은 아Q에게 외상을 주지 않았고, 사당 영감조차 그를 쫓아내려 했으며, 아무도 그를 불러 일을 시키지 않았다. 은전을 차고 돌아오자 잠시 존경의 눈길을 던지나 그것이 도둑질에 의한 것임을 알자 싸늘히 시선을 거두고 피했으며 종국에 가서는 아Q를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 평하고, 오히려 즐거움을 주는 참수형이 아닌 것에 실망한다. 이들 역시 아Q의 삶을 비극적으로 몰아간 주인공이다.

루쉰은 <아Q정전>에서 중국과 중국 민중 전체를 향해 날카로운 펜을 들이댄다. 짜오 어른으로 대표되는 지배층도, 혁명에 앞장서는 가짜 양반도, 부화뇌동하며 아Q처럼 살아가는 민중들도, 청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조차도 그의 펜을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이다.

▲ 국립현대무용단의 <아Q정전> 공연에서 아Q의 모습.

아Q주의, 불행한 사회를 살아가는 교활한 대응법

<아Q정전>은 중국문학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 문학 속에 어엿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수많은 독자들이 여전히 읽고 있다. 또한 연극으로 영화로 무용으로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수많은 아Q로 재탄생하고 있다. 신해혁명기의 중국 민중을 형상화한 아Q. 그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루쉰이 시대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형적 인물로서 아Q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쉰의 성공은 문학에 대한 루쉰의 기본적인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루쉰은 비록 혁명을 위한 무기로서 문학을 택했지만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

루쉰은 ‘현재 우리들의 문학 운동에 대하여’라는 기록에서 “작가란 그 어떤 인물을 그리든, 그 어떤 소재를 사용하든 자유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작품에 '민족혁명 전쟁'이란 꼬리를 달고 그것을 기치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작품 뒤에 붙인 슬로건이 아니라, 그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사상과 정열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중국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도 <아Q정전>에서 만난 아Q는 생동감 있는 실존 인물처럼 느껴진다. 햄릿형 인간이라는 말이 있든 ‘아Q형 인간’이라는 말을 대비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아Q형 인물이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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