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크게 배우는 곳'을 뜻함일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들어가서 아무 거침없이 자유롭게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배우고 논하는 자리가 곧 대학이라는 것이다. 사회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와도 대등하게 서서 자유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곳이 바로 대학이 아니었던 가 한다. 그래서 대학은 사람들에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은 어떠한가. 누구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찾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대학은 너무나 옹색한 곳이 되어버렸다. 대학을 들여다보자.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입시경쟁제도가 부여하는 등급 점수에 따라 대학생이 된다. 그 대학생들은 사회 제도가 규정한 방식대로 또 다시 강제된 경쟁을 거쳐 규격화 된 등급을 받아 사회로 나아간다. 등급화 된 사회가 요구하는 최종 '등급 생산지'가 곧 대학이다.

더욱 큰 문제는 왜곡되어버린 대학을 더욱 더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회의 흐름이다. 강제 등급 교육을 털어내고 대학의 근본인 자유 의지를 학교 교육의 가치로 들고 나선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는 등급을 우상화하는 극우 정치세력과 언론, 이기에 눈먼 학부모들의 파상 공격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 심지어는 교육계 안에서조차 전교조는 '종북세력'으로까지 매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유 의지와 '민주'라는 대학의 근본을 살려내고자 교수들이 결성했던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도 대학인들의 무관심 속에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사회는 대학이 등급 생산자로 충실하게 복무할 것을 강요하고 있고, 대학 안에서도 그러한 추종이 대학의 미래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등급은 속성상 높은 곳만을 지향한다. 그리고 차별과 배제를 내포한다. 등급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고사시키고, 사회 제도 속에서 선택받고 남의 위에 서는 것만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등급은 계급과 불평등을 강제한다. 사회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아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도 이미 조성된 등급사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주인과 종복으로 이분화 된 전 근대적 사회에서 그랬듯이, 그 사람은 잠시 일반 종복과는 다르게 대접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종복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따라서 대학이 등급 생산 공장으로 계속 존재할 때 그 사회는 희망이 없다. 우리가 염원하는 사회 즉, 모두가 함께하고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사회는 기대할 수 없다.

대학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등급 생산 공장의 기능을 당장 멈추어야 한다. 대학은 모두를 품어 안고, 모두가 자유롭게 세상과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노자는 계곡(溪谷)의 낮음에서 세상을 보았다. 계곡은 낮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물이 흘러들 수 있고, 고비며 고사리들도 싹을 틀 수 있다고 했다. 노자는 그래서 계곡의 신(神)을 도(道)에 비유하여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알 수 없는 생산자라고 한다"고 했다. 우리 대학이 누구도 받아들이고 누구도 자신의 의지대로 자라날 수 있는 낮고 낮은 계곡, 알 수 없는 생산자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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