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선배 중에 ‘총장의 아들’이 있었다. 2007년 정도로 기억한다. ‘정몽준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를 두고 학생들 사이의 반대 여론이 결집돼 학내 곳곳에서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 중 정문과 후문에 붙은 ‘패러디 영화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영화 주인공 대신 총장 얼굴이 들어간 다소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학위 수여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총장 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이었다. 학교 측 의견을 듣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창구가 필요했다.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농담 조금 섞은 진담으로 한 선배가 그 총장 아버지를 둔 선배에게 “아버진 잘 계시냐”고 물었다. 진담 조금 섞은 농담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학교 오다가다 그 (패러디) 포스터로나 한 번씩 본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당시엔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저 웃을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농반진반’이라지만 아들도 보기 힘든 총장이라니.

사실이 그렇다. 대학 4년 동안 총장 얼굴 한 번 보고 졸업한 학생이 얼마나 될까. 2011년 <전대신문> 편집국장을 맡아 할 때 총장 인터뷰를 하게 됐다. 질문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총장 인터뷰 준비 때문에 바쁘니 나중에 전화할게”라고 말하자 그 녀석이 내게 “총장도 만나고 잘 나가네”라고 말한다. 총장 만나는 게 잘 나가는 거라니. 그럴 만도 하다. 매년 열리는 ‘총장배’ 축구대회에 총장이 안 온다. 학생들은 총장을 만날 일이 없다. 마치 봉건시대 성주마냥 군림은 하되, 볼 수는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주변 학생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총장’을 묻자 많은 학생들이 “학생들과의 벽을 허무는 총장”이란 답을 해왔다. 그래, 학생들은 총장이 보고 싶었던 게다. 지금까지 ‘바람직한 총장상’으로 알려진 것들, 쉽게 말해 돈 많이 따오고, 학과 이익 챙겨주는 총장은 교수들의 소망이었고, 직원들의 논리였다. 투표권 가진 자들의 독단 말이다.

누군가는 학생과 총장이 만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물을 수도 있겠다. 역으로 묻고 싶다. 당신 눈에 기소되어 낙마한 총장추천자 두 명이 보이는가. 당신 귀에 총장직선제 폐지에 통탄하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그게 다 당신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렇게 총장이란 제왕을 ‘당신들의 천국’ 속에 가둬놓고 굴리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번 총장 선거 파탄의 핵심 원인이 향응 접대와 연구실 방문이다. 선거법의 해석 여부를 떠나 어쨌든 일일이 접대하고, 만나는 작업이 이뤄졌던 것은 그것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2만 5000명의 재학생과 비정규직 교수와 학내 곳곳의 노동자(우리는 교직원에다가 이 모든 사람을 더해 ‘학내 구성원’이라 부른다)에게 모두 투표권이 있었다면 그런 작업이 진행됐을까. 1,200명 교직원표 얻으려다 2만 5,000표가 날아가는 어리석은 짓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은 모른다. 그들만의 영역을. 총장직선제 폐지가 왜 문제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총장이 누군지도, 만나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볼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0일 열린 재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1,200 구성원의 명예”(총장 선거 투표권이 있는 전임교원 수가 약 1,200명이다) 따위의 소리가 후보자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로 전 김윤수 총장이 했던 지리산 종주 프로그램이 좋았던 것은 산행이 끝난 뒤 학생들이 “총장님과 함께 해서 좋았다”는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총장과 가까워지고 싶다. 우리의 새로운 총장은 ‘1,200 구성원’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 모든 구성원 곁에 있는 총장이었으면 한다. 학내 모든 구성원이 내 손으로 총장을 뽑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끔 해줄 수 있는 총장 말이다. 그래서 다시 총장직선제가 시행될 땐 반쪽짜리, 학내 구성원 사이를 구분 짓는 직선제가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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