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소설은 미완성…인간세상의 야만성 다룬 작 쓰겠다”

 

바람을 닮았다. 김훈 작가를 만난 지난 1일, 여수에는 바다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다바람을 맞으며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기자는 그가 바람을 닮았다고 느꼈다. 약간 바랜 듯 보이지만 자기 발에 안착한 운동화와 조금 남는 듯한 면바지, 허리춤에 매어있는 허리가방, 청남방과 등산용 모자, 까만 시계, 그리고 옆으로 매고 있는 큼지막한 가방까지. 이 모든 게 김훈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25년간 걸어온 언론의 길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고 있다.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등을 펴낸 ‘낭만’ 김 작가를 여수 ‘진남관’ 마루에서 만났다. /엮은이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달라.
1948년에 태어났다. 같은 해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내가 3살이 되던 무렵 우리 가족은 전쟁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 서울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굶주렸다. 나 또한 그랬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중퇴한 것으로 알다.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었나?
1966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전공분야가 재미없어 영문학과로 전과했다.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군대에 갔고, 제대 후 나는 복학하지 않았다. 이유는 2가지었다. 집에 돈이 없었고 학교에 뜻을 잃었다. 학교를 그만 둔 것이 애석하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혼자 세상에 부딪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학벌이 완전하지 않음에 대한 편견이나 불이익이 있었지만 별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대학시절 꿈은 뭐였나?
TV와 냉장고 공장의 생산담당이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1968년 배고프고 굶어 죽어가던 사람이 많던 시절,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흑백 TV와 냉장고가 나왔다. 모든 국민의 소망은 흑백 TV와 냉장고를 사는 것이었다. 나는 TV와 냉장고를 잘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급하고 나도 그 대가로 잘 살고 싶었다. 인생의 ‘낭만적’ 목표는 없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꿈에 당당했다. 이러한 꿈은 청년으로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저급한 것이 아니다. 밥 못 먹는 시대를 밥 잘 먹는 시대로 바꿔야겠다는 생각과 비민주적 사회를 민주적 세상으로 바꿔야겠다는 것은 같은 이치다. 난 대학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의 ‘김훈’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그런 것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싫어하는 나에게 “학교가라, 공부해라” 말하지 않았다. 가난해도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 부모님께 매우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 옆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해방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사람의 노예가 된 비참하고 치욕적인 사회를 한탄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래도 이 나라를, 우리 민족 삶의 맥을 이어온 사람은 저 동포들”이라고. “가엾은 동포들이 우리 맥을 이어왔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아버지는 인간을 보는 눈이 굉장히 성숙했고, 어른스러운 이해력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당한 고통과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다. 이제는 아버지가 내 아들 같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게 되어 드는 느낌인 것 같다.

▲왜 기자가 됐나?
군 제대 후 1973년 신문사에 들어갔다. 언론의 길을 밝히고 정의를 건설하려는 거룩한 뜻이 있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것이었다. 기자는 나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밥벌이 수단으로 꾸역꾸역 했다. 여러 번 사표도 냈었다. 그래도 두려움은 없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고프고 억압받았던 어린 시절 속에서 나는 고난을 뚫고 나가는 것에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요즘 세대들은 문제해결은 별로 못하는 데 불합리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나보다 100배는 잘하더라. 하지만 내가 그들보다 잘하는 것은 난관을 돌파하는 것이다. 그게 세대차이다.  

▲<칼의 노래>는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대학시절 <난중일기>를 읽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었고 두려웠다. 그 책은 젊은 날의 내 영혼을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며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먼 훗날 이것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35년 후 나는 <칼의 노래>를 썼다.

 

▲본인의 책을 스스로 평가해 본다면?
사물의 구체성을 파악하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나 자신이 구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관념적 사유에만 젖어있는 경향이 있다. 구체성을 파악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풍경을 미세하게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썼던 책은 모두 무효다. 앞으로 쓸 책 중 정말 좋은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현재는 인간세상의 야만성을 다룬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왜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김훈처럼 좋은 글을 쓸 수 있나?
'갈증' 때문이다. 내부로부터 드러나는 갈증, 필연성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나와 세계는 불완전하다. 거기서 오는 갈증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 삶의 구체성 위에 놓인 글이 좋은 글이다. 글 속에 일상의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 개념어, 관념어, 추상어만 가지고는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우리 대학과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젊은이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 같다.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욕망을 대학이 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학은 공적인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의 족쇄에 묶이지 말자. 사회가 묻는 질문에 대학은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전남대는 민주화 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대학이다. 그러한 힘들을 미래사회를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사회를 개조하려는 열정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힘이 더해진 대학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학생들에게는 책 많이 읽으라는 소리 안하겠다. 책 별거 아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책 속에 길은 없다. 길은 실천적 행위 위에 있다. 책 속에 있는 길이 갈 수 없는 길이라면 그것은 길이 아니다. 삶의 구체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김 작가는 삶의 풍경을 미세하게 바라다보며 글 쓰는 발단을 찾는다. 진남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도 기둥 하나하나, 돌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지며 오래도록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의 필력은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력'에서 나오는 듯하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기자에 질문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혹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싶냐”고 다시 되묻자 그는 “책, 학교, 글이 없는 낙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대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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