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성녀로 받들고 있는 테레사 수녀에 못지않은 외국인 종교인이 한국에도 있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보름 전쯤 한 신문에서 "'한국판 테레사' 서서평을 기억하시나요"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었다. 내용인 즉, 서서평(엘리제 셰핑의 한국 이름, 1880-1934)이라는 여자 선교사가 1912년 조선에 들어와 '사랑과 섬김'을 온 몸으로 실천하다 소천 했는데, 지금까지 그 발자취가 우리의 망각 속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온 뒤 간호사로 일하던 중에 개신교에 투신했고, 32살 되던 해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되어서는 조선의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에 걸친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 집에서 살다가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 '조선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계에 지대한 역할도 했다고 한다. 1926년 당시 조선의 한 매체는 서 선교사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단다. 서 선교사가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녀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다 숨진 뒤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로 추모했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 시에서는 당시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그녀를 모셨고, 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우들과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다고도 한다.

사실 60평생에 40년 이상을 광주에서 보낸 나는 그동안 '광주에 대해서는 나도 알 만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주라는 우리의 터전을 가르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작자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상황들이 드러나면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신문의 보도 내용만 해도 그렇다. 우리 광주 '양림동의 역사'가 한국 기독교사에서 큰 장을 차지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내용은 전혀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 없음은 어디 그뿐일까? 이 지역에서 봉건체제의 타파를 위해, 일제 식민 지배를 벗기 위해, 민주와 자유를 찾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고 숨져간 분들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은 과거를 먹고 산다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과연 그 얼마일까. 어려운 땅, 그것도 소외받은 이 땅에 ‘사랑과 섬김’을 심고 간 푸른 눈의 성스러운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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