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숙명적으로 선택이라는 행위 앞에 놓이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은 기준을 근거로 판단을 요하는 우리들의 행위로 나타나며 그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택은 확실치 않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선호(자세)를 여러 가지로 만들게 한다.

경제학에서는 불확실성하에서 선택의 행위에 대한 분석을 1940년대 폰 노이만(J.von Neumann)과 모르겐스턴(O. Morgenstern)의 기대효용가설(expected utility hypothesis)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기대효용가설은 선택이후 기대되는 소득의 크기와 그 선택으로 인해 누릴 만족도(효용:utility)를 비교하여 위험을 선호하는 사람, 기피하는 사람, 그리고 위험에 중립하는 사람으로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구분이 되었다고 하여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대의 차이가 때로는 위험을 선호하게도 하며 기피하게도 한다.

봄 마중과 함께 재학생들에게는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며 새내기들에게는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 캠퍼스의 3월은 설레임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설레임에는 여전히 많은 선택이 함께한다. 개강과 동시에 수업을 들어보고 다른 수업으로 바꿀 것인가를 선택하여야 하고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할지도 선택하여야 한다. 젊음의 청춘시절 확실한 소득의 크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즉 선택으로 인한 효용이 큰 선택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사회는 청춘들에게 위험을 선호하지 말 것을 강권한다. 한 번의 실패에도 낙인을 찍을 듯이 하며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취업을 위한 틀에 맞추어진 학습을 스스로 또는 학교와 사회에 의해 요구한다. 모두가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처럼.

그러나 선택의 순간, 새내기들이여 위험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어라. 설령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위험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어라. 기대효용가설이 이야기 하듯 기대되는 확실한 소득의 크기보다는 그 일을 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신만의 만족, 즉 효용(utility)이 더 큰 일을 선택해 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위험을 기피하거나 중립적이 된다면 사회의 발전은 더딜 것이며 심지어 퇴보할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청춘이며 이는 청춘에게 주어진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 청춘의 실패는 사회의 자산이 될 수도 있으며 실패한다고 하여 세상이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청춘의 대학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나가게 되면 선택의 기준에 많은 제약이 생겨 위험을 기피하게 된다. 그때 위험을 기피하거고 위험에 중립적이 되어도 늦지 않으며 대학시절의 기회를 다시 찾기란 어렵다.

청춘들이여 즐기자! 위험을. 그리고 바꾸자!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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