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주도적 역할…“광주의 밝은 미래를 꿈꾼다”

“5·18에서 살아남은 자의 도리, 그 도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5·18민주화운동(이하 5·18) 기록물’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등재라는 엄청난 성과 뒤에는 든든하고 성실한 ‘빽’이 있었다. 현대사를 사랑했던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단장, 현재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조정관 자리를 맡고 있는 우리 대학 안종철 동문(교육학·74)이다.

▲역사와 정치 분야 ‘모범’생

유신체제 시절, 우리 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는 안 동문은 학교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자부심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내가 입학하는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항상 따라와야 하는 것”으로 봤다.

어려서부터 역사와 정치 분야 등의 공부를 좋아했다. 많은 것을 알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다. 대학 시절 그는 “공부를 좋아하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범생이었다. 안 동문은 우리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국민윤리학을 공부했다. 정치교육의 일환이었던 국민윤리를 배우다 “교수가 마음에 안들어” 정치학으로 석사과정을 다시 밟는다. 그리고 우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마친다.

‘정치철학’, ‘정치사상’ 등을 주 전공으로 하여 ‘해방 전후사’, ‘한국 현대사’ 등에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썼다. <광주·전남 현대사>라는 박사 졸업 논문은 책으로까지 발행될 만큼 이슈가 됐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룬 학자는 그 당시 안 동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 역사 자료의 근거가 될 만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그 기록들을 차근차근 수집했다. “지방사를 최초로 정리”한 그는 그야말로 역사와 정치 분야의 ‘모범’생 이었다.

▲‘5·18 전문가’ 안종철

안 동문이 5·18에 관한 사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게 된 계기는 송기숙 교수의 영향이 컸다. 1970~80년대에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당시 체제를 비판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송 교수의 ‘강직하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에 안 동문은 감동했다. 그는 “5·18 항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는 송 선생님처럼 강직하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석·박사 과정을 바탕으로 한국현대사 분야의 다수 논문을 작성한 안 동문은 ‘해방전후사’, ‘한국전쟁기’, ‘북한역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책임연구위원으로 8년간 활동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1996년, 그는 광주시청의 5·18전문위원으로 발탁된다. 안 동문은 4년 동안 5·18의 역사를 정리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안 동문은 5·18 희생자들의 보상기준을 마련하고, 5·18국제학술심포지움 등을 기획하는 등 5·18관련 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민주열사에 대한 보상기준 업무가 인연이 되어 2000년에는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약 2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안 동문은 1960~9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정리를 담당했다.


▲5·18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앞장서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만들어지면서 안 동문은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장’으로 채용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국의 차별문화를 개선하는데 이론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 이후로 안 동문은 지금까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해오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2009년 이후 MB정권의 영향으로 인권위원회가 축소돼 면직을 당한 것이다(2년 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안 동문은 복직했다).

면직을 당하고 안 동문은 광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네스코 등재 관련 일을 시작했다. 이전부터 안 동문은 총 50권의 5·18사료전집(1권당 800페이지)을 만들어 ‘자타공인’ 5·18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안 동문은 5·18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직접 추진단장 역할을 담당해 5·18기록물을 전체적으로 손수 정리했다. 결국 2011년 5월 25일, 영국 멘체스타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서 5·18기록물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결정됐다.

그는 “몇 천 년 전 역사 자료만이 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5·18기록물과 같은 현대사도 분명 유네스코에 등재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형사재판기록, 필리핀 민중혁명 음향 녹음 수집품,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인권 기록 등과 같은 것들에 있었다. 그 역사들과 5·18은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안 동문은 확신했다.

안 동문이 꾸준히 정리해온 자료들 덕분에 2009년 말부터 약 5개월 만에 광주는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민주화와 인권 위해”

우리 대학 출신으로서 그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 스스로가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을 해낸 것이다. 나아가 전남대를 넘어서 “광주시민인 것에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안 동문은 “5·18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 광주시민의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줬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글로라도, 기록으로라도 그 때 그 현장을 남기겠다는 마음이 원동력이 됐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그는 5·18에 더없는 애정을 쏟았다. 가슴이 울렁울렁 했던 시절을 그는 쉼 없이 기록하고 정리했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바로 광주에 ‘민주화운동 인권 기록관’을 만드는 것이다. 안 동문이 꿈꾸는 그 기록관에는 5·18이 있고 민주화가 있고 인권이 있다. 그것을 꿈꾸는 이유를 물었을 때 안 동문은 “광주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을?”이라고 물으니 그는 “무엇이든”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남은 생에 “광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는 “광주명예를 키워나가는 데 힘쓰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안종철 동문은 ▲1988~96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책임연구위원 ▲1996~2000 광주광역시청 5·18 전문위원 ▲2000~02 국무총리소속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2009~11 5·18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 추진단장 ▲2002~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장, 행정기획본부장, 기획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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