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방송 작가의 길, 끊임없는 도전의 삶

80년대 학보사 기자로 혼란했던 민주화운동 시기를 살았고, 90년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17년이라는 세월을 방송작가로 보냈다. 현재는 능력 있는 작가라 정평이 나있는 우리 대학 노윤 동문(지역개발학·89)을 만났다.

글을 쓰고 싶었던 여중생
노 동문이 처음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사소한 계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문예반 선생님이 광주일보 시백일장에 그가 쓴 시를 내보라는 조언이 그것이다.

“어떤 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상금으로 5만원을 받았다. 그 시절이 벌써 25년 전이니, 생각해보면 큰돈이었다. 어머니가 매우 좋아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그가 작가의 길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4년간의 학보사 생활
대학에 와서도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노 동문이 지원한 학과는 작가의 길과는 정반대였다.

“과에 대한 고민을 많이 안했다. 선생님께서 전망이 좋은 과를 선택하라며 지역개발학과를 쓰라는 말에 이 과를 선택했다.”

그는 입학 후 자신이 학과 전공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학보사 기자였다. 노 동문은 “글 쓰는 사람이 될 거란 생각에 학보사에 매진했고 그 경험이 현재 사회에 나와서 도움이 많이 됐다”며 학보사 생활에 대한 소회를 털어놨다.

노 동문이 입학한 시기는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는 대학 4년 동안 학생기자로 전국의 대학을 누비며 학생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노 동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며 학보사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야당총재였던 김대중과의 인터뷰는 그가 학생기자를 하면서 경험했던 것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애송이었구나”라고 느꼈다.

“야당총재라는 인물 앞에서 하는 말만 줄줄이 받아 적고 끝났다. 그 때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학생운동 현장도 잊지 못할 기억중 하나로 꼽았다. 1989년 8월 평양대축전이라는 행사가 진행됐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북한에 우리나라 대학생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평양대축전과 관련한 통일집회의 현장에 취재기자로 있었다.

“지리도 모르는 서울에서 2박 3일 동안 서울의 낮거리,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현장은 최루탄이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당시 학생기자가 보도하는 것은 민주화의 현장이었다.

경력 17년 방송작가 노윤
글을 쓰고 싶던 중학교 소녀는 방송작가 모집을 시작으로 성인이 되어 1994년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교양프로그램에서 활동하다 예능프로그램으로 넘어간 특이케이스였다. 하지만 무작정 올라온 서울생활은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춥고 배고픈 기억뿐이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것이 큰 숙제였다. 안정된 생활은 도태 되지 않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작가라는 직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방송작가의 특성상 수입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 중 ‘VJ특공대’와 ‘스타킹’을 “행운의 프로그램”이라고 칭하며 애착을 드러냈다. VJ특공대에는 7년이라는 시간을 쏟았다. VJ특공대를 하면서 노 동문은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시청자들이 좋아할까, 매일 고민하며 항상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덕분인지 교양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25.9%라는 시청률이 나왔다.

그 이후 그는 2008년부터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활동한다. 평소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노 동문은 “비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송에 출연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꼈다. 스타킹을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시청률을 누르는 쾌거를 이루며 그는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곳곳 우리네 이야기를 담아냈다. 프로그램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그녀의 프로그램을 완성도 높게 만들었다.

방송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녹녹한 일만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작가가 가장 자기에게 잘 맞는다”고 말한다.

“이 직업은 자신이 ‘1인 기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느 순간 일이 끊겨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때도 있고, 능력의 한계를 맛보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아이디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때면 작가 일이 만족스럽다.”

17년 동안 작가생활을 하면서 많은 프로그램을 집필했지만 지금도 노 동문은 “모두가 인정하는 프로그램을 꼭 만들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서울과 지방의 벽 허물어야”
노 동문은 지방대생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지방대를 나왔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인생에서 이런 벽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인 것이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유능한 인재를 벽이라는 이유로 무시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부딪치며 허물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지방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위해서는 “마음의 준비 등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학교 자체적으로도 “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학생, 지방에 있는 학생으로 나뉘는 현실에 미리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오픈될 수 있는 인재로 만드는 커리큘럼이나 학습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국형인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노 동문은 “지방에서 공부했지만 단지 서울이라는 곳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것 뿐”이라며 “지방대 콤플렉스가 아닌 인생의 도전을 위한 하나의 환경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그 또한 무작정 간 서울이었지만 새로운 도전과 목표를 설정해 달려가는 곳에 불과했고 현재 그곳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노윤 동문은 ▲1989 전남대학교 경영대학 지역개발학과 입학 ▲1993년 전남대학교 졸업 ▲1994 MBC ‘선택! 토요일이 좋다’ 방송작가 데뷔 ▲1995 SBS ‘출발 모닝와이드’ ▲1998 SBS ‘행복찾기’ ▲1999 KBS ‘조영남이 만난 사람’ ▲2000 KBS ‘VJ특공대’외 다수 집필 ▲2008~ 현재 SBS ‘스타킹’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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