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 교사 복직, 전교조 합법단체로 만들어…생명 존중 생각과 실천

1936년생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모두 겪었다. 유신치하의 ‘기막힌 현실’을 경험하면서 부조리한 사회에 손가락질 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모두를 아우르는 그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제5대, 6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생명과 평화에 관한 운동에 힘쓰고 있는 우리 대학 정해숙 동문(의학·55)이다.

훨씬 행복했던 시절
무남독녀로 태어난 정해숙 동문은 어렸을 적 몸이 약해 툭하면 쓰러졌다. 날마다 코피를 흘리기 일쑤였고 그런 그를 담임 선생님은 매번 업어다 집에 데려다 주었다. 딸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 동문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농구부에 들여보냈다. 매일 정규수업이 끝나면 농구코트로 달려가 열심히 운동을 했던 그다. 그때를 떠올리며 정 동문은 “행복했다”고 말한다.

“수업이 끝난 후 미술실에는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로, 음악실에는 노래하는 학생들로, 웅변연습실에는 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가사실습실에는 맛있는 음식냄새가 났으며 농구코트와 축구장에는 학생들이 뛰어다녔다. 학생들의 활발한 활동들로 학교는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조용한 학교, 지금의 죽은 교육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 동문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농구를 계속했다. 당시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공부는 공부대로 해 우등상도 놓치지 않는 소위 ‘엄친딸’이었다.

지옥 같은 현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우리 대학 의과대에 합격한다.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 아버지의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쓰러져 몸져누웠고, 정 동문은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기 위해 휴학계를 낸다. 어렵게 2년간의 대학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그는 의과대에 돌아올 수 없었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상황이 안 됐다. 솔직히 대학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지옥을 경험했다. 2년간의 등록금도 빌려서 다녔다. 힘들었던 시절에 좋은 수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지옥생활은 일생의 보약이 됐다. 감사한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른 어머니를 바라보며 정 동문은 “직업이라도 얻기 위해” 교육청을 찾아간다. 당시는 교사 수가 현저히 부족했던 때라 의과대를 입학했던 이력이 있는 그는 과학교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신청 15일 만에 문교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과학교사자격증이 나왔고 정 동문은 신문에 난 수학교사 모집(당시 과학교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수학교사에 지원할 수 있었다)을 보고 응시했다. 그리고 1961년 8월 1일, 교사가 됐다. 이 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군부독재 아래의 교육현장에서 그는 “현실 사회가 후퇴하고 있음”을 느꼈다.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사회가 발전한다고 착각하지만 물질적 풍요는 선진국을 구분짓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철학관을 가지고 있는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그는 계속해서 ‘기막힌’ 교사생활을 경험했다. 1972년 유신헌법 선거기간동안 교사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가정방문을 해야 했다. 가정방문을 한 교사는 학부모에게 “유신헌법이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법이다. 꼭 투표해서 이 좋은 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해야 했다.

“정부의 시녀노릇을 하고 있는 교사는 죽은 교육, 거짓된 교육을 해야 했다. 군부독재의 하수인 역할에 수치심을 느꼈다. 침묵을 강요하고 창의적 현장 교육을 억압했다. 점수만을 중요시 하는 교육은 결국 삼천포로 빠졌다.”

‘참’교육 위해 전교조 결성
반공교육,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식 교육에 신물이 난 정 동문은 학생들에게 “남과 북은 같은 형제다. 적이 아니다. 통일은 꼭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순간 반공교육에 찌들어 있던 아이들의 눈은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목이 메었다. “참교육을 시킬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독재정치의 변하지 않는 공식은 우선 교육과 언론을 탄압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봉쇄하고 정권유지에 도움 되는 것들만 가르쳤다. 권력자에게 불편한 존재들은 모두 빨간색으로 칠해버렸다. 인권침해와 살생은 당연한 세상이었다.”

1984년 민중교육지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교육자들이 뜻을 모았다. 이 후 1987년 교사협의회가 만들어졌고 1989년 5월, 전교조가 결성됐다. 전교조는 “국방비 줄이고 교육에 투자하라”, “통일 교육하겠다”고 주장했다. 뜻있는 인사들은 전교조를 전폭 지지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교조에 가입한 1,522명의 교사들을 모두 해직시켰다. 평소 존경했던 교사들이 부당하게 해직 당하자 고등학생들은 “선생님을 돌려 달라”며 시위했다. 대구의 김주경 학생은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부당 해직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정 동문은 1991년 전교조 광주지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전교조위원장 자리에서 ‘참’교육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정 동문이 위원장으로 있을 때 전교조는 1993~1994년에 걸쳐 해직된 교사들을 모두 복직시켰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힘으로 1998년 9월 1일, 정 동문은 10년 만에 교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복직 1년 만에 전교조는 합법화(1999년 7월 1일)가 됐고, 그것을 지켜보며 정 동문은 “눈물의 정년퇴임”을 했다.

“하루빨리 통일돼야”
“하루빨리 통일을 해야만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정 동문은 “통일 없는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말하며 통일을 강조했다. 통일 없는 세계화도 그에게는 허울뿐인 것이다. 통일을 위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키워내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 동문은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를 인정하는 ‘합창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사상을 넘어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는 불교적 가르침도 받아들인 그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회, 서로를 이해함으로 평화를 얻는 사회”를 위해 평생을 달려온 그는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따뜻한 ‘초’를 닮았다.

정해숙 동문은 ▲1961~1989 공립 중·고 교사(수학과) ▲1978 한국도서관협회 이사 ▲1987 전국교사협의회 부회장 ▲1989 해임(전교조 가입으로) ▲1991 전교조 광부지부장 ▲1993~1996 전교조위원장 ▲1996 민주노총 부위원장 ▲1998 복직(광주기계공고) ▲1999 정년퇴임(광주기계공고) ▲1999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중앙위원(상임위원) ▲2000 인드라망 생명 공동체 공동대표 ▲2001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이사 ▲2003 생명평화학교장 ▲2009 (사)국제문화도시협회 이사장 ▲2010 김대중 대통령 어록 전시회 준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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