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려… "편한 것보다 힘든 것 가치 있어"

학교 교가에는 ‘무등산 정기를 받아’라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너무 자주 등장해 상투적 표현으로 치부되는 그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는 이가 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등산을 지켜왔다. 무등산과 관련한 일이라면 제일 앞에 나선다. 무등산을 “세계적 산으로 만들겠다”는 일곡중학교 체육선생님. 바로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본부장 김인주 동문(체육교육·74)이다.

산이 좋아 산악운동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김 동문은 우리 대학 산악회에 들어간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산을 좋아했던 터라 산악회 말고는 다른 동아리는 생각도 안했던 그다. 산악회 활동에 매사 열심이었던 그는 산악회 회장도 도맡아 했다.

“대학시절의 산악활동이 지금 무등산보호 운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무등산 활동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김 동문은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부터 ‘산악운동’을 주도해 왔었다.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을 재창립해 산악운동의 일환인 ‘산악구조대’를 창립하고 산악연맹 학생들과 에베레스트 원정도 도전했던 그다. 이 후 1982년 산악인을 대상으로 하는 등산학교를 설립해 정규반, 암벽반, 동계반으로 나눠 꾸준히 1년에 100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김 동문은 산악문화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건전한 산악문화를 위해 산의 훼손을 방지하는 캠페인도 벌였다. 이러한 것 모두 단지 “산이 좋아”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무등산을 살리자’
1987년부터 그는 무등산 운동을 조직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그의 생각은 실행에 옮겨졌다. 1989년 김 동문은 무등산보호단체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무등산보호단체를 이끌어오고 있는 진정한 ‘운동인’이다.

당시 산들은 취사, 음주, 야영, 고성방가 등으로 몸살을 앓던 때였다. 계곡에선 악취가 났고 능선에는 배설물이 뿌려져 있었다. 잦은 산불에, 산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김 동문은 몸살을 앓는 산을 회복시키기 위해 ‘무등산을 살리자’는 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은 ‘쓰레기 되가져가기’, ‘취사금지’ 등의 실천을 이끌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6개월 만에 무등산은 취사·음주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을 맞는다. 이 후 정부는 자연공원 내에서 취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환경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장돼 맺은 결실이었다.

‘유별난’ 산사랑
“무등산은 꼭 어머니를 닮았다.”

완만한 능선의 정상에는 천왕봉, 인왕봉, 지양봉 이렇게 삼봉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김 동문은 “삼위일체, 평등사상, 대동사상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높고 낮음이 없어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인권·평화의 이념과도 연결된다”고 했다. 5·18민주항쟁의 정신도 ‘무등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봤다.

또 무등산은 광주의 ‘산소통’ 역할을 해오고 있다. 무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100만 명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 동문은 무등산을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표현한다. 어머니의 젖줄은 곧 ‘생명줄’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보고 느꼈던 무등산은 광주의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 동문에게 무등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무등산은 우리에게 무수한 혜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무등산의 경관은 사람들의 정서를 치유하고 있고, 항상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기에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이렇게 무등산을 자랑하듯 설명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가 얼마나 무등산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무등산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유별난’지를 잘 알 수 있다. 그 사랑이 지금껏 그가 무등산을 위해 일하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중봉 군사기지 이전, 불법상점촌 이주, 누에봉 복원, 증심사지구 복원, 광주호 생태공원 위락시설 저지, 무등산 주변 아파트 난개발 저지, 증심계곡 개발 저지, 수목보존, 무등산 자락을 복구한 ‘무돌길(총 길이 51.8km, 15개 구간)’ 개방…. 이것들 모두 무등산에 대한 유별난 그의 사랑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는 ‘무등산 운동’을 세계에서 가장 ‘유별난 운동’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내실 있는 ‘산사랑 운동’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산을 지켜내겠다. 그러한 운동을 계속해서 해내다 보면 무등산이 언젠간 ‘세계 속의 무등산’으로 자라나지 않을까.”

무등산을 국립공원으로 승격시키는 일, 무돌길을 국내 최고의 ‘명품길’로 만드는 일, 무등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켜 세계적 산으로 만드는 일, 무등산 주변 사유지를 공유화 시키는 일, 무등산의 아름다운 옛길을 발굴하고 개척하는 일 등 김 동문의 유별난 산사랑 운동의 계획에는 끝이 없다.

‘남 일’이 결국 ‘내 일’이더라
권력도 금력도 없이 명분만으로 싸우는데 역경도 많았다. 명분만으로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했고 권력이나 금력 앞에 무등산 운동은 법적 제지를 받기도 했다. 운동 중간에 김 동문은 난치병을 앓으며 힘든 투병생활도 견뎌야 했지만 무등산을 지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고생을 사서 하냐는 주위 사람들의 말도 있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하냐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남을 위해 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더라.”

보수도 대가도 없이 싸워왔던 지난 22년간의 세월 덕분에 김 동문은 오늘도 열심히 무등산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 일’하는데 망설이는 후배들에게 김 동문은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학교 안에만 있지 마라. 어렵고 힘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봐라. 그것은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남의 일이 곧 내 일이다. 남의 일은 모두 내 일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경계하라. 날 위해 사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일지 모른다. 살아보니 편한 것보다는 힘든 것이 가치 있더라. 젊어서 고생, 사서 해보자.”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을 가르치고 실제 운동을 하고 있는 김 동문은 천상 ‘운동하는 사람’ 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쭉 좋은 사람들과 “넓게 운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인주 동문은 ▲1978 전남대학교 졸업 ▲1982 광주등산학교 교수부장 ▲1983 광주·전남스키협회 상임부회장 ▲1985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1995 광주전남산악연맹 산악구조대 구조대장 ▲1988 광주중앙여고 양궁 감독 ▲1987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운동본부장 ▲1990 광주·전남 동계에베레스트원정등반 선발대장 ▲1994 무등산사랑환경대학 부학장 ▲2000 무등산공유화운동재단 상임이사 ▲2002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1994 자랑스런 무등인상 ▲1996 누리문화환경대상 ▲2002 관현민주대상 ▲2003 전교조 교육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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