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의지와 생명의 시인으로 유명한 청마 유치환 시인이 쓴 <행복>의 첫 구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희망한다.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 것인지를 알기에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이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가 요즘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더욱 마음에 와 닿는 이유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주체로서의 삶을 잃어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경쟁’에 노출되어 살아왔다. 입시 지옥을 거쳐 대학에 오니 스펙을 쌓으란다. 끊임없이 높아지는 ‘요구 스펙’ 앞에 완벽한 스펙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면서 주체를 갖는 것 자체가 낙오를 각오하는 상황이 됐다.

사랑하는 것은 타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을 때 상대방이 물질적으로 선물을 주고 정신적으로 마음을 주면 기분이 좋아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가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는 물질적인 풍요를 제공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물질과 오락을 통해 얻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김동근 교수(국어국문학·현대문학)는 사랑하는 것을 “줌으로써 갖는 것”이라 표현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을 주고, 편지를 보내고, 마음을 건네는 일련의 행위 속에서 얻는 설렘과 떨림, 더불어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그리고 마음까지 모두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체로서 사랑을 하면서 얻게 되는 행복이다.

생의 마지막, 사랑한 기억을 떠올릴 것인가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릴 것인가. 적어도 그 때만큼은 삶의 주체여도 좋다. <행복>의 마지막 구절처럼.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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