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전대광장 홈페이지(www.jnusquare.com)에 부끄럽게도 필자의 이름이 거론됐다. ‘사사오입’이란 ID의 누리꾼은 ‘이번 선거와 교내 언론기관’이란 제목의 글에서 “편집국장 소중한이 운동권이라는 소문이 들리던데”라며 “선거철 돼서 전설만 까대는 것 보니 소중한이 운동권이란 말이 더 와 닿는다”고 적었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 처음 저 글을 접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ID 사사오입이 필자를 강제로 집어넣은 ‘운동권’이란 집단의 기준이었다. 마르크스(K. Marx)를 좋아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집회나 시위엔 소극적인 필자의 면모는 운동권으로 규정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친절하게도 ID 사사오입은 본인이 생각하는 나름의 기준을 다른 글을 통해 설명해줬다. 그의 기준에 따른 운동권은 “무리한 시위 참가와 북한을 찬양하는 Action with 17845(이하 액션) 선본의 계보”이고 비운동권은 “주로 학내 문제와 학생 복지에 중점을 두면서 등록금이나 법인화 문제에는 개입하는 전설 선본”이었다. 황당하다. 이런 편파적 기준이면 필자가 운동권에 속하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액션에겐 학내는 없고, 전설에겐 시위는 없단 것인가?

“기준의 불분명은 힘의 논리에 따른 패거리 문화를 부른다”는 노양진 교수(철학·언어철학)의 말처럼 위의 황당한 기준은 결국 ‘편 가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명확한 기준에 의한 가르기는 엄정한 판단을 가능케 하지만 불분명한 기준에서는 ‘내 편, 네 편’만 남는다. 엄정한 판단은 어디에든 정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지만 편 가르기에서의 잣대는 잘잘못과 관계없이 ‘누구 편’인지의 여부다.

다소 역설적이게도 ‘가르기’를 잘 해야 편 가르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거기간 중 다시 한 번 명확한 기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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