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장군…“아무도 밟지 않은 길 택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당시 한 여성의 어깨에 별을 달아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장군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우리 대학 양승숙 동문(간호학·70)이 주인공으로 서 있다. 31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전 지역을 봉사와 특강으로 누비는 그다.

 

▲간호장교 향한 도전
양 동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딸 부잣집(6녀) 셋째 딸로 태어났다. 6·25 전쟁 직후였던 당시, 여자들은 대부분 중학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었고, 집안일을 돌봐야 한다고 혹은 남의 집에 일을 하러 가야한다며 학교를 그만두는 이도 여럿 있었다. 학비가 만만치 않았던 것도 있었고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시집보낼 딸들에게 상급학교를 보내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라는 의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는 시집 갈 때 혼수는 못해줘도 교육은 시켜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교육열이 강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마치고 우리 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양 동문이 간호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큰 언니의 영향이 컸다.

“큰 언니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내가 자연스럽게 간호대학으로 이끌린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양 동문은 간호장교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다. 졸업 후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랬던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전문의 시험공부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당시 그가 했던 일은 전문의 시험에 기출 된 문제를 한 다발씩 베껴주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베껴 문제지를 만들었다. 수련의는 전문의 시험을 합격한 후 양 동문에게 고맙다며 영화를 한편 보여주었는데 영화는 ‘MASH(이동외과병원)’라는 미국영화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국 간호장교의 활동상을 다룬 영화로 그는 영화를 보자마자 간호장교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간호대 학생으로 나도 저렇게 돼 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자연스레 부풀어 올랐다.”

영화에서 봤던 간호장교들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어느 날 국방장학생 홍보를 위해 간호장교가 우리 대학을 방문했다.

“스크린 속에서 보았던 그 멋진 여성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1973년 3월 10일. 양 동문은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당시 대구에 있는 국군군의학교에 입교했다. 그의 “안녕하세요”란 인사가 “충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백의의 ‘전사’…국가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군가와 군의학교 교가 등을 부르며 구보와 행군은 거듭됐다. 그 과정이 익숙해지면서 양 동문은 조금씩 장교다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고된 훈련과 교육을 견뎌낸 그는 계급장을 어깨에 달았다.

“당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던지, 지금 생각해 봐도 가슴이 벅차다.”

월남 전쟁이 한참이던 70년대 초반, 수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그들이 우리 간호장교 손길에 의해 쾌유되어 퇴원하는 모습을 볼 때 함께 기뻐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구의 몸으로 군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전역하는 군인을 볼 때면 매번 함께 눈물 흘렸던 그다. 양 동문은 “젊은이들을 군에 들어온 건강한 모습 그대로 사회에 내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간호장교였던 그는 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일 이외에도 국가재난인 수해와 화재지역, 이리역 폭발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목포공항·괌공항 항공기 추락사고, ‘사스(SARS)’ 검역까지 간호장교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어디든 달려가는 백의의 ‘전사’ 간호장교단의 일원이었음에 정말 감사한다.”

해를 거듭해가면서 그는 대위로 진급했고 이어 소령,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 후 광주병원에 간호부장으로 근무하면서 대령 진급의 기쁨도 맛보게 된다.

대령진급 후 양 동문은 암담한 보직을 맡는다. 1998년 IMF 위기로 간호사관학교의 폐교가 결정된 이후 1999년 8월, 그가 간호사관학교 학교장이라는 보직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모두 찾아다녔다. 양 동문은 간호사관학교의 필요성을 알리고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현역의 신분으로 국가가 정한 정책에 대응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한 병과를 책임지고 있는 중진으로 그냥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결심한 이후 나의 사명이자 책임은 간호사관학교의 부활이었다.”

당시 그는 십장생의 하나인 적송을 지인으로부터 기증받아 학교 정원에 심었다. 그 나무의 생사가 학교의 생사인양 가꾸었다. 2001년 5월 31일, 간호사관학교의 존치가 당정협의회에서 결정됐다. 그가 발로 뛴 결과물이었다. 그때 그 소나무는 지금도 푸르게 잘 버티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장군 탄생
간호사관학교를 살려내고 있던 사이, 여성장군이 나온다는 말들이 언론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2~3명의 여성 대령들의 이름이 각종 언론에 오르내렸다. 유력시 되는 사람들 명단에 양 동문은 없었다. 신문지상에 그의 사진이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진급 발표 날, 늘 습관대로 새벽 4시에 기상한 그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5시쯤 조깅을 나가려다 그만두고 거실 소파에 누워버렸다. 잠이든 그는 생생한 꿈 하나를 꾼다.

“일상처럼 영내 길을 달리는데 내 사방으로 아주 많은 군인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바람처럼 그들의 옆을 스쳐지나가더니 어느새 그들을 뒤로 하고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너무 많은 무리들이 내 뒤를 따라 뛰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 5시, 정훈공보실 중령이 조용히 들어와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진급을 축하한다”며. 당시에 그는 “머리를 쇠망치 같은 묵직한 것으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에게 장군기와 삼정도를 수여받는 순간, 그는 자신이 장군이 된 것을 “절실히 실감했다”고 말했다.

‘최초’라는 수식어 때문일까. 그는 임기(2년) 내내 엄청난 취재와 인터뷰를 받는다. 또 전국을 돌아다니며 최초 여성장군에게 부여된 꽉 짜인 일정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새로운 전쟁터, 정치입문
2004년 1월 9일, 눈물과 감동의 전역식을 마치자마자 그를 향한 정치권 정당들의 손짓이 계속됐다. 여러 고민 끝에 양 동문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그는 “국가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장군이 이제까지 받은 사랑을 국민들에게 되돌려주려 입당을 결심했다”며 “나의 전문분야인 여성·국방·보건 분야의 제도적인 틀을 마련하고 싶다”고 당시 정계입문을 선언했다.

2004년, 당의 비례대표를 약속받고 입당한 양 동문은 당의 권유로 그의 고향 논산 지역구 총선에 출마한다. 정치 초년생인 그에게 선거운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지 못할 순간도 많이 겪었다. 당시 양 동문의 인지도는 8%였다. 그야말로 ‘맨땅의 헤딩’이었으리라.

“그래서 더 뛰었다. 이 밭에서 저 논으로 누비고, 달리고 사람들을 만났다.”

선거당일 집계결과, 양 동문은 상대방 후보에게 2.5% 뒤져 2위에 그쳤다. 2008년 총선에서도 그는 쓰디 쓴 패배의 잔을 마셔야 했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 그는 재래시장으로, 시내로, 금산으로, 계룡으로, 각 면소재지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간의 고마움을 전했다.

“내 사랑하는 고향에서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자. 앞으로의 삶이 비록 고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문을 향해 걸어가자.”

 

그가 항상 가슴에 새기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작은 일에 충성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다. 교회 장로였던 아버지의 말씀을 그는 항상 감동으로 기억했다. 그는 매일을 그렇게 성실히 살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감사하며 살았던 것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지금껏 숱한 어려움을 겪어왔음에도 양 동문은 잘 극복해왔다. 그것은 마치 푸른 하늘을 비상하는 장년의 독수리를 연상케 했다.

늘 좋은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는 양 동문.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가라”고 조언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을 때 창의적인 힘이 발생한다”며 “힘든 길일수록 그것은 나에게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양승숙 동문은 ▲1973 전남대학교 간호전문대학 졸업, 간호장교 소위 임관 ▲1988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석사) ▲1994 간호사관학교 교수부장, 대령 진급, 국방부 간호과장 ▲1995 수도병원 간호부장 ▲1997 의무사령부 의료관리실장 ▲1998 대통령상 수상(공로유공) ▲1999 제 16대 간호사관학교 교장 ▲2001 제 28대 육군본부 간호병과장 ▲2002 장군 진급, 제 19대 간호사관학교 교장, 여성단체협의회 1호패 수상, 올해의 간호인상 수상 ▲2003 보국훈장 천수장 수상 ▲2004 전역, 열린우리당 논산시, 금산군, 계룡시 운영위원장, 열린우리당 충청남도 여성위원장, 열린우리당 국정자문위원 및 안보특위위원 ▲2007 한국전력공사 감사 ▲2008~현재 간호병과발전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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