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자부터 시민운동가, 나노연구센터 소장까지 변화무쌍한 삶

전남 장성군 남면 삼태리에는 나노·바이오산업의 핵심 기관인 ‘나노바이오센터’가 위치해 있다. 센터는 전남 지역의 천연작물들을 나노기술과 접목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창출하기 위한 연구와 개발로 분주하다. 미래의 나노바이오 산업을 선도할 이 센터를 우리 대학 이재의 동문(경제학·75)이 이끌고 있다.

▲ 대학 생활, 인생의 전환점
1956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한 이재의 동문은 여느 농촌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 동문은 중학교 졸업 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 진학을 목표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1980년 5월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대학 시절 학생회의 일원이었던 이 동문은 국가의 감시와 탄압 속에 자유롭지 못했다. “5·18의 중심권을 통과하면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10개월의 징역생활과 '전과자’라는 낙인은 마치 주홍글씨처럼 나의 이력에 새겨졌고, 당국의 감시망은 단 한 순간도 자유스럽게 놔두질 않았다.”
징역생활 이후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우리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긴 시간동안 소외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왕따’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소수집단이나 특정인을 강제로 고립시키는 ‘왕따’ 행위는 어린이나 학생들 사이에서건, 국제사회에서건 도덕적 죄악이다. 아니 인류사회에서 척결돼야할 가장 잔인한 범죄다.”
▲ 5·18 관련 책 집필·번역해 외국에 전파
1984년 말 복학조치에 따라 이 동문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2년의 잔여 학업을 마쳤다. 졸업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됐다.
“잠시지만 밑바닥 생활을 맛 본 나로서는 ‘대학졸업장’이 표상하는 의미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처럼 가난하고 ‘빽’ 없는 젊은이들에게 대학은 우리 사회가 베푸는 마지막 시혜였다.”
5·18 민중항쟁을 계기로 이 동문은 민주화에 대한 사명 의식을 느꼈다. 이는 그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5·18 민중항쟁에 참여했던 동료들과 함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집필했다. 당시 소설가 황석영 이름으로 출간된 이 책은 군사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8의 국제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그는 당시 광주에서 취재를 담당했던 외신기자들과 함께 이 책을 번역해 국내외로 출판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광주를 사랑하는 외국인들과 광주의 진실을 해외에 알리고자 한 우리나라 번역가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전했다.

▲ 부단한 노력이 일궈낸 화려한 이력
“컬러풀한 내 삶이 좋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동문의 이력은 남다르다. 그의 이력을 보면 광주상공회의소(1986),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1988), 광남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1995), 광주시 투자유치자문관(1998), 산업자원부 장관정책보좌관(2004), 전라남도 나노바이오연구센터 소장(2006), 5.18 민주화운동단체 활동, 광주시민연대모임, 언론노동조합운동 등 끝이 없다. 그는 “내가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고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어느 한 분야의 전문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개인적인 핵심 경쟁력 요소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2년 동안 산업자원부에 머물면서 국가 정책 결정에 직접 관여하는 경험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정책 방향과 그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등 전체적인 상황을 아우르는 시각을 길렀다.
하지만 장관이 바뀌면서 다른 직업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간 쌓아왔던 전문성을 살려 고향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그는 전남이 미래 신산업으로 적극 육성되고 있는 ‘바이오 산업’에 눈을 돌렸다. “농업을 기반으로 생명공학기술을 접목시켜 고부가가치형 생물소재산업을 키운다는 것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경제학도에게도 매력적인 일”이라는 그. 이는 그가 나노바이오연구센터 소장을 공모하는 배경이 됐다. 그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나노바이오’라는 융합산업을 새롭게 하나하나 디자인해나가는 일이 여간 보람되지 않을 수 없다”며 “요즘은 나노와 바이오 분야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나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우리 지역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했다.

▲ 특색 살려 철저히 준비하라
“사회는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평소에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 존재하는 일자리의 절반 이상이 10년 이내에 없어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그런 시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두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는 요즘 말로 줄곧 ‘계약직’ 인생을 살아 왔다. ‘정규직’ 경험이 없다. 하지만 그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불안해하지 않는다. 퇴직금도 없고 정년도 보장돼 있지 않은 일만을 해왔지만 자신의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자신이 선택한 여러 분야의 일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약직의 매력에 대해 “정해진 코스대로 따라가야 하는 정규직보다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비정규직의 일을 할 때 집중도가 높다”고 말했다. 자주 직장을 옮기다 보니 직업 선택의 노하우도 여럿 생겼다. 그 중 하나는 ‘블루오션’ 전략이다. 레드오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자가 적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연봉 높은 직업군에만 매달리는 세태 때문인지 과감하게 자신만의 특색을 살려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는 그의 말이 더욱 공감간다.

이재의 동문은 ▲1956년출생 ▲1975년 우리 대학 경제학과 입학 ▲1986년 우리 대학 경제학과 졸업 ▲1986년 광주상공회의소 근무 ▲1988년 광주일보(월간 예향) 근무 ▲1994-2000 광주시민연대모임(국제협력국장), 5.18기념재단(기획위원)▲1995년 광남일보 근무(논설위원, 경제부장) ▲1998 광주광역시 시청(투자유치자문관) ▲2000 광주국제교류센터 (이사) ▲2004 산업자원부 근무 ▲ 2006년~현재 (재) 전라남도생물산업진흥재단 나노바이오센터 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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