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포츠 아나운서가 19층 옥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그녀가 아니고서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얼마 전 어떤 야구선수와의 스캔들과 관련해서 자신의 가상공간상에서의 글이 문제였다는 것을 추측할 것이다. 그녀의 죽음의 원인이 그녀 스스로 만든 자괴감이건, 대중이나 언론이 만들어낸 가십거리의 이야기 때문이건 간에, 죽음까지 선택한데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누가 죽인 것일까? 왜 언론이나 사람들은 그녀의 사소한 개인적인 일에 대해 윤리적인 질타를 가하는 것인가? 어떤 평가 잣대로 그녀의 스캔들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평가를 하는 것인가? 왜 그녀의 죽음이후에 스캔들과 관련된 야구선수에게 책임소재를 묻는 것인가? 그녀가 공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체 그 공인이라는 타이틀과 내용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거의 모두가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과 같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가르기를 분명히 해야 한다. 공인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타 다른 사람들은 공인이 아니라 그냥 가수이고, 아나운서이고, 탤런트이고, 야구선수, 축구선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일뿐이다. 그들에게 공인이라는 타이틀은 맞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공개된 개인일 뿐이다. ‘대중인’이다.

우리의 세금으로 공적인 일을 하는 공인은 우리가 법과 사회적인 통념으로 윤리적인 비판을 할 수 있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 즉 대중인들에게 법 이외에 어떤 윤리적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중인의 행동에 대해 법이라는 테두리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이 옳은 행동이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구분 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가졌다. 그들의 행동이 설사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들의 행동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대중인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게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왜 아기공룡둘리에게, 달려라 하니에게, 천하무적 똘이장군에게 공인이 될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이야기에 대한 보도는 일괄적이다. 경기장에서 혹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 지는 그들의 직업내용을 기사화한다. 대중인들의 사적인 이야기나 스캔들은 찌라시 같은 잡지사, 인터넷 사이트에나 보도한다. 그들은 정보로서의 기사와 가십거리로서의 이야기를 구분해 낼 줄 안다. 우리 사회처럼 병적으로 그런 가십거리에 언론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개인이 집착하지 않는다. 대중인의 행동에 우리는 그들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런 지위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병적인 보상심리에 불과하다. 대중인들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고 포장할 것이 아니라. 사회와 대중이 그들에게 부여된 혜택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고, 그들 스스로가 도덕적인 평가에 음지로 갈 이유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법이라는 잣대가 평가될 것이고, 그것이 불만이면 대중은 대중인의 지위를 박탈하면 그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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