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이후 끝없는 투쟁…시의회 진출해 시민·여성 위해 발로 뛰어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에 위치한 오월 어머니집. 이곳을 지키는 안성례 동문(간호학·54)이 있다. 1980년 5월 이후 지금껏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온 안 동문. 서슬 퍼런 계엄군도 안 동문의 진실에 대한 열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열정 때문에 안성례가 아닌 ‘안순해’로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인 명노근 교수, 그리고 자식들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흘리기도,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엄마’가 보였다. 안 동문 자신도 “본래는 순한 여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 동문을 그렇게 ‘안 순하게’ 만들었을까?

 


▲ 배움 동경한 꿈 많은 소녀 
안 동문은 어린 시절 안두희에 의한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막연히 “독립운동을 위해 애쓴 사람이 왜 암살을 당해야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처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싹텄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아버지는 안 동문이 교육을 계속 받는 것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동문은 오빠가 해 준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배워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담고 계속 배우기를 갈망했다. 함평에서 태어난 안 동문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올라와 전남여중을 다녔고, 그 이후 우리 대학 의과대학 간호고등학교(현 간호대학의 전신)에 입학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안 동문이 결혼을 해 평범함 가정주부로 살아가길 원했다. 아버지가 중매쟁이를 학교로 보내오자 안 동문은 연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마침 지인이 한 청년을 소개해주겠다고 해 만나는데 그가 바로 명노근 교수(당시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생)이다.

▲ 꿈 접게 한 어지러운 정국
“명 교수와 결혼하며 예쁜 가정을 꾸리고, 계속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5·16쿠데타는 그 꿈은 물론 내 가정을 위태로운 벼랑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1959년 안 동문은 명 교수와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4·19혁명, 5·16군사정변이 연달아 일어났고, 군 미필자였던 명 교수는 강제 징집됐다. 군에 들어가는 명 교수의 모습을 보며 안 동문은 ‘내 삶이 순조로울 것 같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명 교수가 교육지표 사건, YWCA 구국기도회 사건 등과 연관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낸다.

1980년 전까지 안 동문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다섯 자녀를 키우기 위해 장흥 관산초등학교에서 양호교사로도 일했고, 이후 1963년에 기독교병원에서 끊임없이 일했다. 남편과 함께 유학을 가 공부하려는 꿈도 생활에 발목을 잡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왔다.

▲ 5월 광주의 싸우는 나이팅게일
5월 21일 공수부대는 퇴각을 위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했다. 무고한 시민들이 큰 부상을 입은 채 기독교 병원으로 밀려들었다. 하필 21일이 석가탄신일이라 휴업을 하지 않았던 기독교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됐다. 춘태여고 3학년이던 박금희 학생이 헌혈을 하고 간 뒤 몇 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오자 안 동문과 병원 사람들은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또 피범벅이 된 외출혈 환자가 내출혈 환자에게 먼저 진료를 보게 해달라는 말을 하자 공동체 정신에 또 눈물을 흘렸다.

안 동문은 환자들을 쉴 새 없이 돌보고, 지켰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이나 광주교도소 등 주요 항쟁 지역에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을 폭도로 취급하고, 국군통합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 안 동문은 이러한 계엄군의 무자비함에 맞서 환자들을 지켜냈다. 당시 안 동문은 계엄군을 향해 “우리는 환자를 병의 경중에 따라 살핀다. 어디서 잡혀왔고, 무엇을 했든 간호사의 도리는 그들을 살리는 것이다”고 소리쳤다. 계엄군이 병원 측을 협박해도 간호감독이었던 안 동문의 소신을 꺾을 수 없었다.

안 동문의 투쟁은 5월로 끝나지 않았다. 구속자 가족회를 조직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5·18민중항쟁의 부당함을 알렸다. 구속자 가족회는 1985년 양심수 가족들과 연대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재탄생한다. 대부분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힘든 부분도 있었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전투경찰에 방패에 밀려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교수는 “대학교수 사모님의 격에 맞지 않다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 동문은 그때마다 말했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아들 딸들을 돌보지 않는데 우리 엄마들이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나.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 사모님이니까 더해야 한다.”

 


▲ 시의회 진출…5·18특별법 제정 주도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재야에서는 시민대표를 시의회에 진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안 동문은 남편의 설득과 여러 인사들의 계속된 추천으로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어릴 적 꿈꿨던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나서기로 결심한다. 안 동문은 자금의 한계와 무소속의 난점을 극복하고 시의원에 당선됐다. 당선 직후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안 동문은 “5·18 현장의 문제를 시의회 차원에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시민후보로 나왔다. 5·18 문제의 해결과 생활정치의 실현이 목표이다”고 말했다.

 

당시 보수가 없었던 시의원 직을 맡아 안 동문은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여성 최초로 3선을 하기도 했다. 특히 5·18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1995년 12월 ‘5·18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1997년 5월 5·18민중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고, 묘지 사업이 추진되면서 역사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안 동문은 시민의 대표이면서 여성의 대표이기도 했다. 여성 인권과 복지를 위해 관련 자리에는 항상 참석했으며,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여성문화회관(현 여성발전센터)을 제안, 건립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 성실한 만학도…“인내 발휘하라”
“행정을 감시하고,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위치에서 ‘행정’을 모른다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회에서 제대로 해보기 위해 내공도 있어야 했고, 여성 최초라는 이름을 달았으니 모범이 되고 싶었다. 공부하는 내내 힘들었지만 시정활동에 깊이를 더 할 수 있었다.”

시의원 생활을 하며 안 동문은 1992년 우리 대학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이미 50대였지만 안 동문의 배움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행정대학원 1년 과정을 마치고 광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우리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시의원 활동과 동시에 한 만학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했다. 안 동문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실함이었다. 현재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점을 강조했다.

“나는 나대로의 가치가 있다. 상대와 비교하지 말고, 인내와 극기를 발휘해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한 젊은이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안성례 동문은 ▲1938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957년 우리 대학 의과대학 간호고등학교 졸업 ▲1963~1991년 광주기독교병원 근무 ▲1991~2002년 광주시의원(3선) ▲2001년 우리 대학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이수 ▲現 오월 어머니집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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