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대사습놀이 장원 천재 국악인…‘얼씨구학당’ 통해 국악 알려

어렸을 땐 일요일 아침이면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월트 디즈니의 만화를 보다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입담 좋은 한 아저씨가 국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아저씨가 내뱉는 구수한 소리 한 구절을 어린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흥겹게 따라하던 ‘얼씨구학당’이라는 프로그램.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번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주인공에 대해 사전 취재하며 그 기억이 불쑥 기자에게 찾아왔다. 현재 광주시립국극단 예술감독인 윤진철 동문(국악·85)을 만났다.


▲ 옆집 소리에 끌려 국악에 첫 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집 근처에 목포시립국악원의 고전무용 선생이 이사를 왔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소리 인생의 첫 발걸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윤진철 동문은 음악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다 당시 목포시립국악원 장복례 선생의 집에서 나오는 소리에 심취해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선생의 손에 이끌려 목포시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이가 11살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윤 동문은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악 경연 대회가 많지 않았던 터라 대부분 일반 성인들과 겨룰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대회에서 1, 2등을 다퉜다. ‘소년 명창’이라는 칭호가 그의 이름에 붙기 시작했다. 이시기 스승인 정권진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선생과 함께 KBS의 국악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연을 맺고, 소리도 인정 받는다.

▲ 직접 그린 병풍들고 김소희 선생 찾아
“직접 그린 병풍 한 벌과 그림 한 점을 들고 김소희 선생을 찾아 무작정 서울로 갔다. 준비해 간 것을 선생에게 건네며 돈이 없어 학채(과거 선생에게 보수로 바치던 곡식을 이르는 말)를 낼 수 없으니 이걸 받고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허락해 주더라.”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판소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윤 동문은 서울의 김소희 선생을 찾아갔다. 집안이 어려웠던 탓에 그는 그가 가진 그림 솜씨를 통해 김소희 선생의 문하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매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가 살며 판소리를 배웠고, 학기 중에도 주말에는 목포와 서울을 오가며 열심히 소리를 했다.

이 시기 변성기가 와 어려움도 있었다. 정권진 선생으로부터는 “소리 그만두고, 한의예과나 졸업해 돈 벌어라”라는 독설도 들었다. 그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터라 김소희 선생은 소리 외에도 예술인이 가져야 하는 철학과 품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중 윤 동문은 1983년 김소희 선생이 당시 가르치던 한양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등록조차 하지 못하고 제적된다. 좌절을 맛 본 그는 그 길로 귀향한다.

▲ 스승 정진권 선생 밑으로…명창 반열에
목포로 돌아온 윤 동문은 어린 학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며 생활을 이어 나간다. 이 때 영화 󰡔서편제󰡕의 오정해 씨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오 씨는 윤 동문 고등학교 친구의 동생이었다. 그의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오 씨는 고등학생까지 모두 참가하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대회에서 장원을 하게 된다. 이후 김소희 선생의 부탁으로 윤 동문은 오 씨를 선생의 문하로 보낸다.

이후 윤 동문은 다시 정권진 선생을 찾아갔다. 절치부심한 그는 선생의 ‘심청가’ 음반을 그대로 외워갔다. 4시간이 넘는 소리를 선보이자 선생은 웃으며 “잘 해냈다. 소리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985년 정권진 선생이 가르치던 우리 대학 국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한창 소리를 배워가던 중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윤 동문은 “정진권 선생으로부터 판소리에 담긴 철학에 대해 배웠다. 재주만 있던 내게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윤 동문은 대학 4학년이던 1988년 전국국악경연에서 장원을 한다. 또한 같은 해 ‘울림 창악연구회’를 만들었다. 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판소리를 직접 가르치는 것은 물론 이론과 발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8년여 동안 활동하며 약 3천명의 회원을 배출했다. 그는 “국악을 수용하는 일반인들의 수준을 높이고, 더욱 판소리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의도를 갖고 울림 창악연구회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졸업 후 그는 전주대사습놀이를 위해 쉼 없이 독공(獨功, 판소리 가객들이 득음을 하기 위하여 토굴 또는 폭포 앞에서 하는 발성 훈련)한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국악 경연대회로 조선 숙종 때를 그 시작으로 삼을 만큼 역사가 깊다. 1998년 그는 결국 판소리부문에서 장원을 하며 명창 반열에 오르게 된다.


▲ 얼씨구학당, 듣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판소리
울림 창악연구회에서 볼 수 있듯 듣는 사람과 함께하려는 윤 동문 마음의 결정체가 바로 ‘얼씨구 학당’이다.
“당시 매우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판소리를 텔레비전을 통해 배운다는 시도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 처음에 사투리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PD와 상의 끝에 ‘마음대로 하라’는 답을 얻어냈다. 오히려 마음을 편히 먹고 방송을 하니 반응이 좋아 프로그램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기존 국악 프로그램의 어렵고, 딱딱한 면을 얼씨구 학당은 과감히 파괴했다.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배우며 윤 동문과 배우는 사람 모두 웃고, 즐기는 분위기로 방송이 진행됐다. 얼씨구학당은 현재 ‘신얼씨구학당’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소리를 하면 나도 즐겁지만 그것으로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더 좋다. 그래서 더욱 나를 갈고 닦는다”고 말하는 그. 얼씨구학당이 계속되는 것도 프로그램에 그의 판소리 철학이 고스라니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시립국극단의 예술감독에 공모한 까닭도 윤 동문의 철학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선임된 그는 “침체된 국악계를 활성화 시켜보고 싶다”며 “새로운 모습을 통해 광주 시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했다. 예술감독의 직책은 극단의 단장이라고 보면 되는데 기존 계속해서 60대가 단장을 해왔다. 이번에 40대의 윤 동문이 단장을 된 것은 젊은 감각을 통해 친숙한 국악을 선보이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광주시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 물을 가득 채워야 배 띄울 수 있어
현재 윤 동문은 우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음악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적접 청강했다. 판소리 이론을 설명하며, 그 이론에 맞는 판소리 대목을 직접 그 자리에서 들려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업에 들어가기 윤 동문이 기자에게 웃으며 건넨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학생들이 사랑가 한 대목은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수창선고(水漲船高, 물이 가득차야 배를 띄울 수 있다). 윤 동문이 제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다. 그는 “배는 있는데 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며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해 놓지 않은 상황에서 기회만 엿본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차례 강조했다. “열심히, 또 열심히.”

 윤진철 동문은 ▲1964년 목포 출생 ▲1983년 한양대 입학 후 제적 ▲1985년 우리 대학 국악과 입학 1989년 졸업 ▲1988년 전국국악경연 장원 ▲1993년~2007년 광주MBC 얼씨구학당 진행 ▲1998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문 장원 ▲2005년 KBS 국악대상 수상 ▲現 광주시립국극단 예술감독, 우리 대학 국악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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