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5·18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정미라 교수(철학·독일관념론)는 학생들이 5·18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길 바랐다.

80년 정 교수는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다. 그녀는 당시 대학을 어수선하지만 활기찬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새내기였던 만큼 당시 시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여 시위·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 날이 되기 전까진 학생회에서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집회에 참가시킨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랬던 정 교수도 국가의 폭력에 맞서 싸우게 만든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평상시 농대 앞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는 5월 17일 평소처럼 책을 읽다가 안경을 자리에 놔둔 채 집에 돌아갔다. 19일 안경을 찾으러 정문을 거쳐 학교로 들어가는데 근처 라면집 주인아저씨가 위층에 빨리 숨어야 한다고 해서 몸을 숨겼다. 알고 보니 불과 몇 분 전 군인들이 학생이란 학생들을 죄다 끌고 간 상황이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지만 버스가 끊겨 그녀는 월산동까지 걸어가야 했다. 광주고등학교를 지나가는데 근처 천변에서 군인들과 시민들이 개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의 행동에 대한 분노감으로 돌도 던지며 시위대 사이를 지나가는데 갑작스레 군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대학 남학생 3명과 같이 근처에 있던 가정집에 피신을 하게 됐다. 가택수색을 당할 것을 대비해 정 교수는 피아노를 치는 척을 하고 다른 학생 3명은 들어오는 군인들을 제압할 준비를 했다. 정 교수는 “잡히면 끌려갈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무서웠다. 집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날이 지나며 밤중에 총소리가 들리고 송정리에 탱크가 출현하는 등 상황은 악화되어 갔지만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정부의 폭력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그녀도 매일 시청 광장에 나가 시민군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정 교수는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여러 사건들이 모여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그렇기에 5·18에 대한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지만 퇴보할 수도 있다. 지금의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것이란 걸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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