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연에의 순응이나 의존에서 벗어나 문명의 혜택에 의해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 데카르트적인 분석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전일적인 시스템적 접근을 소홀히 한 오류도 범하였으나 시행착오를 거쳐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 어차피 우주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도달 불가능한 무한소(無限小)와 무한대(無限大) 개념이 병존하기 때문에 과학도 분석적 사고와 함께 통합적 시각에 바탕하여 전개된다. 나노기술(NT)도 발달하고 있지만 시스템 통합적인 정보통신기술(ICT)도 발전하고 있고 또한 미소(Micro)기술과 거대(Mega)기술이 상호보완적인 상생구조를 이루어 서로간의 발전을 견인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앞으로의 세상은 거대한 과학기술 복합체에 지배되고 이 복합체의 발전논리가 사회 전체적인 발전 패러다임으로 확산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지구촌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과학이 제공하고 있는 편익과 함께 이의 역기능과 위험성도 확대·심화되고 있다. 결정론적 유무에 바탕한 신앙과 달리 과학은 확률론적 신뢰에 바탕한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의 산물이다. 따라서 확률적 신뢰가 의미를 잃게 되고 제한적 합리성이 한계를 보이게 되면 과학은 역기능과 위험성이 극대화 되는 최악의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과학의 존립근거가 되고 있는 확률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고 발생 사상(Event) 사이의 확률적 의미가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등가성을 전제로 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자. 원자력과 관행적 발전소에서 사고라는 발생사상은 위험도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거나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사고횟수라는 측면에서 확률적으로 그 타당성이 설명·신뢰되어 왔다. 아무리 발생 가능성이 낮다고 하여도 광역적인 초토화가 예상된다면 편익이 크다 한들 쉽게 선택할 수 있는가? 또는 선택하여야 하는가?

제한적 합리성의 함정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고 합리적, 즉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이치에 맞는 것이고 그나마 기존의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광우병이 발생하기 이전, 동물영양학자들은 초식동물이라도 필요한 영양분의 원천은 무엇이든 과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바탕하여 동물의 뼈와 내장 등 폐기물을 축산농가에서는 단백질 사료로 사용하였다. 이미 인간 광우병은 파푸아뉴기니어의 식인종에게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자연의 질서를 무시한 과학적 합리성의 비극이 현실화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할까? 과학기술이 인간 생존과 생활에 필수적 지지대인 이상 피해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학기술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차피 세상은 위험을 끌어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안을 수 밖에 없는 위험은 무시하거나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를 냉정하게 이해하고 위험을 정당하게 관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와 함께 인간의 한계로 예상하지 못한 위험이 닥치면 인류애로 협조하여 극복하는 지구촌 연대감이 필요하다. 인류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확신, 희망 그리고 사랑은 과학이 아닌 신앙에서 발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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