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강경대 열사 장례식. 사진제공=한겨레

이른바 ‘치사‧분신의 정국’이라 일컬어지는 ‘1991년의 봄’은 민주화를 열망한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해 4월 26일 명지대 신입생이었던 강경대 씨가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의 강경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도화선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우리 대학에서 열린 ‘강경대 학형 살인 만행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 집회 도중 박승희 씨가 “노태우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을 시도해 숨졌다. 이후 분신한 우리 대학 윤용하 씨를 포함해 6월 말까지 총 13명이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대학생이었고 일부 노동자와 고등학생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은 87년 6월 항쟁에 이어 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보수대연합 정권을 배경으로 ‘민주주의의 불꽃’을 피워보겠다는 항거가 경찰의 탄압 아래 죽음과 분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 5월 5일자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써 민주화 운동세력을 거세게 비난하고 검찰이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발표하면서 정국에 큰 반향이 일었다. 당시 검찰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소속의 김기설 씨의 유서와 가족이 제출한 필적이 다르다”며 유서대필자로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를 지목해 기소했고 법원은 강 씨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후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강 씨는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91년 당시의 저항은 다시 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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