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가 분신하기 며칠 전 나를 찾아와 개인적으로 조그마한 선물을 주더라. 열심히 해달라고.”

1991년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이었던 광주서구문화센터 노훈오 관장(섬유공학·87)은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인터뷰 내내 조리 있게 말을 이어가던 노 동문이었지만 박승희 열사가 준 ‘작은 선물’ 이야기를 꺼내자 그에게서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소중하고, 가슴 아픈 기억이기에 그 작은 선물이 무엇인지 공개하지 않았다.

1991년 4월 29일. 노 동문은 도서관 별관(백도) 앞에서 명지대 강경대 학생의 사망과 관련해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한창 시위가 진행 중이던 때 제 1학생회관 앞에서 불길이 솟았다.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입장에서 당장 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불길이 박승희의 몸에서 치솟은 것임을 전해 들었다.

“충격적이었다. 그 ‘작은 선물’이 이별의 선물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20대 초의 꽃다운 여대생, 순수하고 발랄했던 평범한 학생이 그렇게 불길에 휩싸였다.”

박승희 열사가 전대병원에 있는 동안 그는 빌고, 또 빌었다. 하루 빨리 회복해 학교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함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1991년 4월 29일 이후 그는 박 열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다만 “승희가 온 몸에 화상을 입은 고통의 상황에서 웃으려 했고,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박승희를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1991년 당시를 과거의 사실 자체로 기억하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1991년 당시를 주목해 달라는 욕심은 없다. 죽음 때문에 역사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도 맞지 않다. 2011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감정의 연계성’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기억이다.”

노 동문은 현재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를 넘어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이 세계와 그 역사에 대해 관심 갖길 바랐다. 그가 말한 ‘감장의 연계성’도 이러한 측면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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