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속의 코스모스 꽃잎 박승희 열사…분신 20주기

“승희가 그렇게 됐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곱기만 하고, 조용한 학생인 줄만 알았는데….”

당시 박승희 열사(식품영양학·90)의 지도교수였던 임현숙 교수(식품영양학·영양학)는 분신 전까지 박 열사를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만 생각했다. 때문에 분신 며칠 전 찾아와 소소한 대화를 나눴을 때도 그럴 일이 있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

“중간고사가 막 끝났을 즈음 이었죠 아마.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중간고사를 못 본 이유를 조용히 설명하더라고요. 그렇게 밝은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홀로, 나름대로의 고뇌를 품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20년 전, 시대를 고민하던 박 열사는 그렇게 불길에 휩싸였다.

▲ 여리고 쾌활했던 박승희 온 몸을 불사르다
박승희 열사에 대해 많은 주변 학생들은 그녀를 쾌활하면서도 여리다고 평했다. 목포 출신의 박 열사는 정명여고를 다니던 때 주변 친구들이 전교조 활동에 소극적이자 반 학생들 앞에서 직접 쓴 편지를 읽으며 울 정도로 여리면서도 격정적인 성격이었다. 당시 가정대(현 생활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한 박 열사는 용봉교지편집실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대를 고민하고, 행동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경찰에 강제 연행된 후 이를 항의하는 집회에서 신입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다. 이후 우리 대학 최강일 씨(토목공학·88)가 시위 도중 직격탄을 맞고 한 눈을 잃는 사건도 일어난다. “강일이 오빠가 다치고 강경대 군이 죽었는데도 학우들의 무관심 속에 파묻힌 것이 슬퍼. 직접 죽고 싶지만 죽을 용기가 안 생겨서 못 죽겠어.” 28일 박 열사는 친구 최은아 씨(일어일문·90)에게 이렇게 죽음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목포의 부모님을 찾아가 “보고 싶어 내려왔습니다”라며 끌어안고 울었다.

4월 29일 오후 2시 우리 대학에서 ‘강경대 학형 살인만행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가 열린다. 그 전 12시 경 용봉편집실에서 선전 작업 등을 실시하던 박 열사는 같이 있던 선배들에게 “친구를 도와주려 한다”고 한 뒤 시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시너를 본부 뒤쪽에 두고 2시 시위대에 합류한 박 열사는 도중 시위대를 빠져나와 다시 시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때가 오후 3시 20분 경. 불길을 안은 채 “2만 학우 단결 투쟁, 노태우 정권 박살내자”라고 외치는 그녀가 봉지 주변에 나타난다.

▲ 분신 후 시위 증폭…20여 일 버티다 절명

▲ 1991년 5월 25일 학교에서 출발한 박승희 열사 운구 행렬이 금남로로 노제를 치르러 가는 모습. 노제에는 약 20여만 명의 인파가 모여 박 열사 가는 길을 추모했다.

당시 도서관 별관과 사범대 사이에서 그 광경을 본 박구용 교수(철학·실천철학)는 “군 전역직후였었지. 시위가 왠지 힘이 없어 보였어. 근데 멀리서 불길이 치솟더라고.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라고 말했다. 이어 “분신 직후부터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까지 모두 시위에 힘을 보탰었지”라고 회상했다.  

3시 30분 경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진 박 열사는 치료를 받았으나 온 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게 된다. 이후 차츰 의식을 회복한 박 열사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손과 고갯짓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5월 2일 최강일 씨가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찾기도 했는데 그때 박 열사는 “눈이 빨리 완치되길 바란다”고 손 글씨를 써 보이기도 했다. 5월 18일에는 역시 손가락으로 ‘518’이라고 쓴 뒤 “오늘이 강경대 장례식이다”며 눈을 뜬 상태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 날 6시 이후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그녀는 다음날 12시 결국 절명했다.

이후 오병문 총장을 비롯 현재 미술학과 교수인 신경호 당시 학생처장(미술·서양화)은 박 열사의 장례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신 교수는 “당시 밤낮으로 이곳저곳 다니며 박승희 학생의 장례를 위해 뛰었지. 내가 지금 몸이 아픈 것도 있지만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 정말 정신 없었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20만 애도인파…‘겨레의 딸’로 부활.” 당시 <전대신문> 1029호(1991년 5월 28일자)는 박 열사의 장례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5월 24일 입관식 후 발인식을 거쳐 모교에서 하룻밤을 지낸 박 열사의 운구는 25일 백도 앞 5·18 광장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이어 도청에서 노제를 치렀다. 25일 금남로에는 20여만 명의 인파가 모여 박 열사의 죽음을 추모했다.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 하고 싶다.” 코스모스는 아니지만 박 열사가 스러져간 자리에는 지금 조그마한 비석이 오롯이 놓여있다.

20년이 지나고 그때와 같이 봄이 왔다.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 오는 12일부터 ‘박승희 열사 20주기 행사’가 진행된다. 행사 위원회에 홍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소망 씨(법학·07)는 “열사가 분신한 지 20주기인 올해 우리 대학도, 우리나라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단순한 죽음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열사가 목숨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현재와 비교하며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20주기 행사를 통해 우리 대학의 더 많은 학우들에게 박승희 열사를 소개하고, 함께 공유하고 싶다”고 전했다.

분신 후 박 열사의 가방에서는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라”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우리는 지금 슬퍼하며 울고만 있는가, 아니면 그렇게 있지만은 않은가. 혹 슬퍼하는 법도, 우는 법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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