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정치 에돌면서도 다산에 천착…연구·강의활동 분주

 

행동과 실천. 다산의 철학 중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이다. “아는 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라는 다산의 말처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몸소 행하려 하는 사람. 다산의 철학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다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자신의 이름보다 ‘박다산’으로 더욱 알려진 사람이 여기 있다. 바로 다산 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동문(법학·62)이다.

군사독재, 장기집권에 맞선 행동하는 용기
그는 196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데모 세대’의 일원이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한일수교를 강행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정부와 맞서 싸우던 시절이었다. 대학 시절 그는 어느 데모에서나 앞장 서는 ‘데모 대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대학 생활을 신산한, 쓰고 매운 대학생활이라 소개했다. “내가 생각한 것에 있어선 뒤가 아닌 앞에 나서려 했었지. 요즘 같은 낭만스런 대학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어”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기자도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73년 그는 ‘전남대 함성지’사건에 연루돼 1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 시간을 다산의 5백여 권이 넘는 저서들을 만날 기회였다고 표현했다. 1년간의 복역생활을 끝내고 다산 연구서인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발간한다.

다산 정약용과의 학문적 만남
법학과 출신인 그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사법고시엔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법철학·법제사 등의 과목을 공부하던 중 교수들이 한문을 잘 하는 그에게 ‘한국 법제사’의 공부를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 한문으로만 되어있던 법제사 서적들을 읽어 내려가며 다산의 저서 ‘경세유표’를 접하게 된다. 학생 시절 ‘사상계’라는 잡지를 즐겨 읽었던 그는 정약용의 진보적 철학이 익숙하게 느껴졌다고. 200년 전에 살았던 인물 이지만 다산의 진보적 사상은 현시대를 꿰뚫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다산은 시에서 사회를 비판하며 탐관오리들의 수탈정책에 분노하고 있었고 문(文)에서 탄압받는 백성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그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실천하지 않은 삶을 경계하며 불의와 비리에 굴하지 않고 과거의 학문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개척해낸 다산에게 법학을 넘어선 많은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그와 다산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리가 만들어졌다. 그는「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석사 논문을 발표하며 다산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올바른 생각을 가르치는 선생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70년대 대동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된다. “6∼7년가량 교편을 잡았었지. 나는 학생들이 옳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옳은 책을 읽으라는 조언밖에 해준 게 없어.” 학생들에게 당시의 시대상황을 깨닫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려준 것이 전부라는 그. 그런 자신을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바라봐 준 학생들이 고마웠다고 한다. 올바름을 항상 강조하고 실천하는 스승의 제자였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제자 중엔 대학에 가서 이름을 날린 운동권 학생들이 많았고 운동권의 중심 세력에는 항상 대동고 출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극제가 될 순 있었을 것 같지만 결국 당시 사회를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학생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운동을 했던 것이지”라며 말을 맺었다.

이 시대의 다산
그는 13,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당히 꼬집을 줄 아는 성격은 그에게 ‘청문회 스타, 뉴스메이커, 문공위 3총사’라는 또 다른 별명을 가져다주었다. 국민들을 대표하여 훈장과도 같은 별명까지 얻었으나 그는 한계를 느끼고 ‘다산으로 돌아가자’라는 다짐을 한다. 정치판에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기에 다산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고.
그는 자신을 통해 다산을 이야기하며 다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2003년 다산연구회를 발족하고 2004년 다산연구소를 만들면서 그는 이 시대에 어울리는 다산의 철학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리라 마음먹는다. “이메일로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다산의 철학에 대해 공부하며 강의·강독회를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산의 사상을 알리려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풀어쓰는 다산이야기’를 꾸준히 연재하는 등 불철주야 다산 전파에 애를 쓰고 있다. 대학교에서 강의도 겸하고 있는 박 동문은 대학생들이 다산의 사상을 듣고 깜짝 놀라며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정말 기쁘다고 한다.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 학문다운 학문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데 다산의 철학을 배우며 내가 헛살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한다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중등학교 교육에선 다산은 단지 진보한 생각의 실학자로만 묘사되는데 대학에 와서 다산의 사상을 듣고 놀라하며 흥미를 가지는 대학생들을 보면 힘이 솟는다”며 웃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이 아닌 다산의 철학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는 그. 그는 마치 이 시대의 다산 같았다.

“다산으로 돌아가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다산은 아들들에게 ‘한번 배부르면 살찐 듯하고 배고프면 야위어 빠진 듯 참을성이 없다면 천한 짐승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느냐?’라며 욕심에의 경계를 권고한다. 그러나 현 시대상황은 다산이 원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공과 사의 구분도 없어진 채 쉴 새 없이 터지는 부정과 비리, 남을 배려하지 않는 개인이기주의가 판치고 있는 지금 200년 전 다산의 논리가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논리가 아닌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는 시대에 맞서 모두에게 다산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고 있다. ‘다산으로 돌아가자’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이겨내는 박 동문. 그를 바라보며 우리도 지금부터 다산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박석무 동문은 ▲1962년 우리 대학 법학과 입학 1970년 법학과 졸업 ▲1970년 우리 대학 법학대학원 입학 1972년 대학원 졸업 ▲1998년 ~ 2001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1988년 ~ 1992년 제13, 14대 국회의원 ▲2005.03 단국대학교 이사장 ▲2007.11~현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2004.06~현 다산연구소 이사장 ▲현 성균관대, 단국대 석좌교수 ▲주요 저서로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문학수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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