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편집을 마친 금요일 밤은 ‘끝냈다’라는 홀가분함보다 ‘다음호는?’이라는 압박감이 더 심하다. 지난 1476호 편집을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말 중 이것저것 자료를 수집해 신문이 나오는 월요일 회의를 주재했다. 아무튼 항상 고민이다. 다음호, 그리고 그 다음호는 무엇을 신문에 실어야 할지.

지난주 초에 위로부터 박승희 열사 20주기 기획을 준비하라는 명을 들었다. 뜨끔했다. 올 초 20주기 행사 준비가 초기 단계였을 무렵 “다채로운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라 보도해 놓고, 지금 그 시기가 다가왔는데 잊을 뻔했다. 어쨌든 이번 10, 11면의 박승희 열사 20주기 기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러 분들을 만나고 싶었다. 20주기 행사위원회의 사무국장님께 여러 분들 좀 추천해달라고 했다. 마침 <한겨레>에서 1991년 분신정국을 다뤘기에 참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노훈호 동문을 만나기 위해 서구문화센터를 찾았고, 박 열사 지도교수이셨던 임현숙 교수님, 학생처장이셨던 신경호 교수님과도 연락이 닿았다. 우연히 박구용 교수님과 담소를 나누다 당시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 얻어 걸린 경우도 있었고, 행사위원회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재학생 김소망 씨와도 몸이 안 좋은 와중에 문자로나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지막으로 원고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정희곤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회장님과도 글로나마 소통할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1991년 4월을 수집하다보니 각양각색의 기억이 뒤섞였다. 사람 뿐 아니라 전대신문 김태성 선배, <한겨레> 곽윤섭 기자를 통해 얻은 사진을 통해서도 당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기억들은 얼기설기 엉켜 복잡했지만 그 역동성으로서 필자를 1991년으로 이끌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시시각각 변하는 ‘소중한’이라는 존재가 언제든 ‘소중한’으로 불릴 수 있게 하는 것. 즉 필자를 필자 이게끔 하는 것. 좀 더 나아가서는 존재의 원동력. 그렇다면 필자는 1991년을 기억하고 있었던가? 뒤늦게 위로부터 받은 명으로 이번 박승희 열사 20주기 기획을 준비한 것. 쥐어박고 싶다. 겪지 못했다고,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자.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라.” 박 열사의 이 말이 위와 같은 의미는 아니었을런지….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