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입적한 ‘큰’ 스님 …집착·다툼 버린 ‘무소유’의 길

법정스님이 2001년 9·11테러 후 강론을 하러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를 소개하는 현수막에 ‘법정큰스님’이란 표현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스님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 항변(?)한다. “난 법정큰스님이 아니라 법정스님이지라.” ‘큰스님’이란 말은 일종의 ‘중벼슬’ 격인 용어이다.

지난해 3월 11일 ‘큰스님’이길 한사코 거부하던 ‘큰’ 스님 법정이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스님이 입적한지 1년 즈음해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기획에 그를 싣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전 스님의 말이 떠올라 멈칫하게 됐다. “만약 내 이름을 팔아 쓸데없는 일을 도모한다면 저승에서라도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겠다.”

첫째로는 스님의 뜻에 어긋날까 걱정됨에, 둘째로는 필자의 졸렬한 필력 때문에 글을 써 나가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스님이 한 때 몸담았던 우리 대학의 후배들에게 우리 시대 큰 스승의 삶을 전하려는 ‘쓸 데 있는’ 목적을 위해 글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부디 이해해주시길….


▲ 학창시절 문학, 철학 서적 즐겨
법정스님은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 울돌목 지척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1947년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학제에 비춰봤을 때 목포상고는 현재의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 이후 1950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는 학제 개편이 이뤄지면서 목포초급상과대학이 만들어 지고, 스님은 1951년 이곳에 입학한다. 이후 목포초급상과대학은 상과대학(현재 경영대학)을 명칭으로 하여 1952년 의과대학, 농과대학 등과 함께 우리 대학의 출발에 선다. 그리고 1953년 스님은 우리 대학 상과대학에 진학한다.

법정스님은 학창시절 독서를 즐겼다. 특히 문학, 철학에 관련된 서적을 즐겨 읽었다. 이는 훗날 스님의 사색과 그 사색에서 나온 뛰어난 문장들의 초석이 되었으리라. 또한 그는 동료들과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여러 곳 중에도 특히 산사에 다니길 즐겼다. 영암 용당리에 있던 축성암을 가장 자주 찾았고, 해남 대둔사, 영암 도갑사 등에도 방학 중이면 꼭 들렀다.

바다 또한 그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동료들과 ‘푸른 별’이란 친목 모임을 만들어 흑산도, 홍도 등에 놀러 다녔다. 당시 흑산도, 홍도는 배편이 좋지 않아 지금처럼 쉽게 찾아갈 수 없었다. 이는 그만큼 때 묻지 않은 청정구역이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스님은 ‘맑고 향기로운’ 섬을 찾아 가슴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러던 1955년 3학년 진학을 앞둔 법정스님은 휴학을 결심한다. 학비를 내기가 어려워졌던 것. ‘푸른 별’ 동료들이 돈을 모아 학비를 마련했지만 스님은 거부했다. 동료들은 스님의 완강함에 밀려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학생 박재철(스님의 속명)의 마지막 대학생활은 2학년에서 끝이 난다.

▲ 1955년 출가…󰡔무소유󰡕 등 집필
1954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왜색 중 추방을 요지로 하는 불교정화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계 정화운동이 1955년 본격화 되면서 목포지역에 정혜원이라는 정화운동본부가 생긴다. 법정스님은 처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생각하고 정혜원에서 잡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스님은 출가를 결심한다. 11월 25일 동료들과 함께 사진관에서 이별 사진을 찍고, 중식당에서 송별회를 갖는다. 평소 술을 즐기던 스님이었지만 이 날은 자제했다. 그날 동료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며칠 후 스님은 오대산을 향해 서울행 기차를 탄다.

눈이 많이 와 오대산으로 가지 못한 법정스님은 서울 안국동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과 함께 공부했다. 1956년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하다 1959년 양산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한다.

1960년대 법정스님은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이후 서울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도 몸담는다. 또한 이 시기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을 겪은 스님은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 운동 등에 힘을 쏟기도 한다. 하지만 1975년 인혁당 사건 이후 수행자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그해 10월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거처 삼아 생활한다. 이곳에서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1976)가 탄생한다. 이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입적 전까지 살아왔다.


▲ 다툼은 소유에서 나와
법정스님의 삶은 말 그대로 ‘무소유’이다. 스님의 ‘난초 일화’는 무소유 정신을 가장 보여준다. 스님이 봉은사 다래헌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어떤 스님으로부터 난초 두 분을 선물 받았다. 법정스님은 이 난초를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관련 서적을 구해다 읽고, 구하기 힘든 비료도 줘가며 애지중지 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정도로.

그러던 어느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를 뵈러 갔다가 문득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 떠올랐다. 지체 없이 돌아왔지만 햇빛에 오랜 시간 노출된 난초 잎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물을 축여 줘 겨우 잎이 고개는 들었으나, 예전 같은 생기는 찾지 못했다. 스님은 이때 “집착이 괴로움”이란 것을 느꼈다. 더불어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이고,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남을 깨달았다. 그는 무소유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된다”고 말했다.

자칫 허무함으로 들릴 수 있는 무소유의 개념이 우리를 허무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얻는다”는 위의 말 때문일 것이다. 스님이 󰡔버리고 떠나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 때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법정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1953년 우리 대학 상과대학(現 경영대학) 입학 ▶1955년 입산 출가 ▶1976년 󰡔무소유󰡕 발간 ▶2010 입적

▶대표저서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2009), 󰡔한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2009), 산문집 󰡔영혼의 모음(母音)󰡕 (1972), 󰡔무소유󰡕(1976), 󰡔서 있는 사람들󰡕(1978), 󰡔산방한담󰡕(1983), 󰡔물소리 바람소리󰡕(1986), 󰡔텅빈 충만󰡕(1989), 󰡔버리고 떠나기󰡕(1993),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6), 󰡔오두막 편지󰡕(1999), 󰡔홀로 사는 즐거움󰡕(2004), 󰡔아름다운 마무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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