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생들이 취업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것이 있다. 바로 ‘아싸’ 면하기. 아싸는 아웃사이더(outsider)를 줄인 일종의 속어로 좁은 의미에서 ‘학과 활동을 하지 않는 학생’을 지칭한다. “너 아싸니?”라는 질문을 ‘굴욕’으로 여기 것이 풍토다.

사실 진짜 아싸는 ‘아싸 면하기’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지대로 대학 생활을 해 나간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몸을 움직인다. 학과 활동 중 본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꺼이 참석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아싸를 면하기 위해 조급함을 느끼는 이들은 진짜 아싸가 아니다. 단지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이다. 과 활동에 대한 의지가 높고, 과도할 정도로 과 활동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니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혼자 밥 못 먹고, 수업 혼자 못 듣는 것도 이와 비슷한 심리다. 어찌 보면 같이 밥 먹을 사람, 같이 수업 들을 사람을 찾아 과 활동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 두 형태의 학생들에 대해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들이 과 활동을 안 하든, 과 활동에 집착하든 그것은 개인 선택의 영역이다. 그 사적 행동의 영역은 공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이름으로 그 사적 행동을 제약한다면 문제가 된다. ‘불참비’가 그 꼴이다. 참가비의 반대말인가? 명목은 대략 두 가지로 압축된다. 참가율을 높이기 위해서, 참가하는 학생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

강제보다 더 무서운 게 구조를 이용하는 것인데 ‘불참비’는 강제로 과 행사를 참여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비겁하다. 그 구조도 정말 질 낮다. “돈 내기 싫으면 와” 식이다. 공동체를 위한 것? 그렇게 간 MT에서 진흙탕에 신입생들 굴릴 것 아닌가? 그것도 공동체를 위한 것? 불참비 없는, 굴리지 않는 과는 산산조각 날 것이라 할 판이다.

사적 영역을 공적인 것으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대학생은 학과 활동을 포함,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존이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듯 우리에겐 ‘아싸가 될 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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