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희들 곁을 떠나신지 어언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옥체금안(玉体錦安)하셨는지요? 어머님께서도 잘 계신지요? 큰 형과 동생도 잘 지내고 있는지요? 저도 동생들과 함께 잘 있습니다만, 소식 올린다는 게 너무 늦어 면목이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엄격함 그 자체이셨고, 제 삶의 스승이셨던 아버님. 제가 어렸을 때 저희 가족들이 아버님과 한 상에서 함께 식사해 본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아버님은 고개 들어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셨고, 엄격하기 짝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당시 이 나라 교통사정이 그토록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호남에 국립종합대학 만드시겠다고 그리도 빈번히 서울을 왕복하셨던 아버님이셨습니다. 철도편 끊어질 때면 오토바이 손수 몰고 죽을 고비 넘겨가며 문교부 높은 문턱 닳고 닳도록 오가셨던 분, 백두진 님 자택에서 하숙하셨던 것이 인연이 되어 백두진 총리 시절 문교부 장관 제안을 받고서도 국립 전남대학교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 우선이라며 끝내 장관직을 고사하셨던 분. 그 분이 아버님이셨습니다.

전남대학교의 창립과 발전을 위해 온 정성과 열정을 다하셨던 분, 중앙 정부로부터 대학교의 설립인가가 나자마자 광주시 외곽의 진흙탕 길을 마다 않고 찾아다니시며, 지금의 용봉 언덕에 대학터전을 닦으셨던 분, 더욱이 집에 있던 그 수많은 도자기, 동양화, 서예품 등을 박물관 만드신다고 아낌없이 기증하셨던 분. 그 분이 아버님이었음을 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남대학교의 기틀이 다져지면서 큰형에게는 “반드시 전남대학교에 들어 가야한다”고 말씀하신 반면 저에게는 “서울로 가건, 광주에 있건 너 알아서 해라. 그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때까지도 전 아버님에게서 그다지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라던 저에게 생전 처음 가슴 찡한 아버님의 정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대학 3학년 중 군에 자원입대해서 사격 훈련을 받고 귀대하던 중 군용차가 저를 훈련대장실로 데려갔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들어가 보니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저를 아버님께서 훈련대장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지요. 아버님께서는 보따리 하나 저에게 펼쳐 보이시며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 년 전 먹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갈비찜! 망설임도 없이 정신도 없이 갈비찜 한 통을 순식간에 바닥내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아버님과 눈이 마주쳤고, 아버님의 흥건한 눈물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 눈물은 그토록 엄격하시던 아버님의 눈물이 아니었으며 정감 가득 찬 아버님의 따뜻한 모습이셨습니다. ‘아버님 마음속에 나도 자리하고 있었구나’하는 가슴 벅찬 감격! 그날 밤 전 밤새도록 뒤척이며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지금에도 저는 그때 아버님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아버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셨습니다. 늘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고, 교육의 목적도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겸손과 겸허의 마음가짐을 가르쳤던 분도 아버님이셨지요.

엄격한 그 자체이셨던 아버님. 그토록 모진 가운데서도 깊은 자식사랑 마음속에 감추고 계셨던 분. 전남대학교의 창립과 발전을 위해 온 열정을 다하셨던 분. 제 영원한 그리움과 존경의 대상으로 저의 가슴 한복판에 면면히 살아 계시는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한 큰형, 동생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만나 뵐 때까지 옥체강녕(玉體康寧)하시길 바랍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2011년 2월 16일
차남 원우 배상
최원우

*이 글은 1973년 12월 12일 작고한 우리 대학 초대, 2대 총장 남강(南崗) 최상채 박사의 둘째 아들 최원우 님의 글입니다. 또한 이 글에서 거론한 ‘큰형’은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고인이 된 당시 우리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전남대병원 외과과장 최원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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