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실패 딛고 성공신화 '부도옹(不倒翁)' 별명… 작년 타계 아쉬움

“대학 졸업하자마자 처음 입사한 곳이 바로 대신증권이다. 그때는 정말 정정하셨는데…. 오늘 왕회장님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대신증권 주가는 급등 중. 아마 M&A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대주주지분이 취약한 대신증권이 다른 곳으로 M&A가 안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수많은 대신 출신의 금융권 CEO 때문이었는데…. 왕회장님이 돌아가시면서 그 가능성이 부각된 것이다. 한동안 대신증권의 녹을 먹었던 나로서는 착잡하다.”

어느 블로그의 냉소적인 글을 보았다. 지난해 12월 대신증권 양재봉 명예회장(상학·51)이 별세한 직후 어느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이다. 그의 죽음이 그가 몸담았던 대신증권의 주가를 올라가게 했다. 아쉽게도 팔릴 가능성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존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증권사는 굳건했다. 한 마디로 양재봉 동문을 표현할 수 있겠다. ‘금융계의 거목.’

 

검소와 신용의 철학

양재봉 동문은 1925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농부 양홍철 씨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삶에 있어서 아버지는 근검절약의 철학을 가슴 깊이 새겨 준 큰 존재였다. 그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러 가다 무심코 길가에 소변을 보고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소변은 소중한 거름이다. 소변 한 방울도 아껴야 한다”는 말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다.

그는 당시 최고 명문인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사업가의 힘을 키운 뒤 1943년 졸업 후 곧바로 조선은행(現 한국은행의 전신)에 입사한다. 그가 금융계에 내딛은 첫 발걸음이다. 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조선은행이라는 직장이 그의 사업가 기질을 억누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광복 이후 조선은행을 퇴직한 양 동문은 곧바로 양조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그의 최초 사업인 양조사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실패 속에서도 그는 모든 자산을 팔아 부채를 말끔히 청산, 끝까지 신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신용’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금융 경영자로서의 첫 발

이 시기 양 동문은 27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우리 대학에 입학한다. 현재 경영학과인 상학과에서 수학한 그는 1955년 졸업, 만학의 꿈을 이룬다. 졸업 후 그는 다시 금융권에 발을 내딛는다. 한일은행에 입사한 그는 70년대 초 청량리지점장이던 시절 9억 원이던 지점 수신액을 1년 반 만에 네 배로 불린다. 이 사건은 당시 은행가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단자사(단기금융시장에서 자금의 대차 또는 중개를 주요업무로 하는 회사)를 설립 금융업 경영자로 처음 나서게 된다.

이어 양 동문은 1973년 당시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 등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한다. 하지만 이 시기 정부가 자본시장 육성의 의지를 보이자 이에 대응해 증권회사 설립으로 방향을 튼다. 각종 규제로 인해 신규 설립이 어려운 가운데 그는 기존 증권사 인수에 힘을 쏟고 결국 1973년 대신증권의 전신인 중보증권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인수 직후 그의 신조인 ‘신용’에 따라 회사 이름을 ‘대신(大信)’으로 바꾼다. 정부의 증권사 대형화 계획에 맞춰 대신증권은 자본금을 20억 원으로 늘리며 1977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되고 양 동문은 사장에 취임한다. 그는 창업 당시 시장점유율 1.9%에 불과하던 대신증권을 업계 2위인 9%까지 올려놓는다.

 

시련, 그리고 화려한 재기

그의 인생 중 가장 큰 시련이 이 때 찾아온다. 사장에 취임한지 4개월 만에 당시 영업부장이었던 박 씨가 고객 돈을 횡령해 자신의 부채를 처리한 이른바 ‘박황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재를 털어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한 뒤 임원들과 함께 사퇴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당시 투자자들에게 끌려 다니다 찢긴 와이셔츠를 10년이 넘도록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마 절대 잊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이후 용인에서 3년 동안 돼지를 키우며 와신상담하던 양 동문은 결국 1981년 다시 대신증권 사장에 복귀한다. 당시 자산보다 부채가 30억 원이나 많던 대신증권에 복귀하는 심정을 “결자해지”라 표현한 그는 그 자신부터 솔선수범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형승용차 대신 소형 ‘포니’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고, 임직원들과 함께 ‘구두쇠 100일 작전’, ‘개미작전’ 등 의식 개혁과 비용 절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이 시기 양 동문은 탁월한 안목으로 정부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 채권투자에 재원을 총 동원한다. 사회 불안 속에서 채권수익률이 급등한 가운데서도 그의 예상은 적중해 대신증권의 회생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 1886년 대신개발금융. 1988년 대신투자자문, 1989년, 대신생명보험, 1990년 대신송촌문화재단(이하 재단), 19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설립하며 종합금융그룹의 꿈을 이룬다. 이 시기 그가 얻은 별명이 ‘부도옹(不倒翁)’이다. 와이셔츠가 찢기며 끌려 다니던 그는 넘어지지 않는 거목으로 우뚝 섰다.

 

혜안을 통해 최초가 되다

다시 우뚝 선 양 동문은 위기 후 더욱 굳건해졌다. IMF도 그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이 시기 금리 폭등으로 인해 업계 5대 증권사 중 대신증권 외에 네 곳이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뀐다. 이는 그가 2년 전부터 보유 자산을 처분해 단기차입금을 모두 갚고, 무차입경영(신규차입보다 상환액이 많거나, 이자수익이 이자비용보다 많음을 의미)에 들어간 그의 혜안이 큰 몫을 했다.

그의 대신증권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그는 증권회사의 본질은 기업 자금 조달에 있다고 판단해 채권 인수시장과 기업공개 시장을 선점했다. 또한 전산 발전에 역점을 두고 1976년 최초로 증권 전산화에 나서 1979년 각 지점에 ‘전광시세판’을 들여 놓기도 했다. 온라인 시스템 역시 타사보다 먼저 구축해 1999년 이후 온라인 거래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어 대신증권의 중흥기를 이끌기도 했다.

2001년 양 동문은 증권 산업의 빠른 변화에는 차세대들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지금은 고인이 된 차남 양회문 씨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은퇴한다. 이후 그는 사회 공헌 활동에 의욕적으로 나선다. 재단을 통해 장학사업, 사회복지사업을 펼친 것은 물론 2010년 별세 직전까지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신문과 책들을 정독하는 치열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 대학에도 재단을 통해 지난 2007년 경영전문대학원(이하 경전원)에 1억 원을 기부한데 이어 2009년에는 경전원의 한 학생에게 졸업 때까지의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기로 하는 등 1977년부터 약 7억 여 원의 장학기금을 기부해 오고 있다.

 

정도를 걷는 삶

양 동문은 항상 정도를 걸었다. 믿음도 검소함도 모두 정도를 걷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의 철학일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기불황을 겪던 2009년, 동시에 양 동문이 생을 떠나기 1년 전 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정도 경영이 가장 중요합니다. 즉 합리적이며 합법적으로 경영을 해야 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능력의 범위를 넘어 단순히 외형 확장만을 추구하거나 도를 넘는 방만한 경영이 얼마나 위험한 지 다들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기회가 오듯 이번 사태를 거울삼아 내실을 기하는 정도 경영을 펼친다면 어떤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다. 그가 살아온 삶 그대로이다.

 

양재봉은 ▶1925년 전남 나주 출생 ▶1943 목포상업고등학교 졸업 ▶1944 조선은행 입행 ▶1955 전남대 상과대 졸업 ▶1967 고려대경영대학원 석사 ▶1973 대한투자금융 창업 ▶1975 대신증권 창업 ▶1984 대신경제연구소 창업 ▶1985 대한증권업협회 부회장 ▶1988 한국상장사협의회 부회장·대신투자신탁운용 창업 ▶1990 대신그룹 회장·대신송촌문화재단 설립 ▶1991 전남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199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97 전국경제인연합회 금융재정위원회 위원장 ▶2001 대신그룹 명예회장 ▶2010 노환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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