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과 공론의 장”이라는 주제는 하버마스나 아렌트 같은 철학자가 근본적인 고찰을 하였기에 철학이나 정치학 분야에서 더 잘 다룰 수 있는 주제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의지가 충만한 필자가 경영자를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 대리인 이론관점에서 논의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의사소통의 문제는 조직차원에서는 정보전달과 유인체제구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분업/협업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전문화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분업은 필수적인데 이 나누어진 일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는 문제가 부각된다. 조정방식에는 시장과 조직의 두 가지 대안이 있다. 시장사용 방식에서는 사유재산권에 근거, 자기 행동에 대한 편익과 비용이 자기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모든 개인은 최적행동을 한다(엄밀하게 말하면 시장실패가 있을 수는 있다). 조직사용 방식에서는 조직성과 개인의 기여도를 측정하기가 쉬운 경우 그 성과측정에 근거한 보상체계를 구축하면 역시 모든 개인은 최적행동을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나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느냐?(Who monitors the monitor?)"는 문제는 대리인 문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것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이상적이라면 함포고복 시대처럼 리더가 누구든 상관없고, 공적 논의도 필요 없으며, 자기이익 최대화 행동만 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좋은 제도의 구축노력이 필요하며, 리더와 공론장이 중요한 것이다. 조직이 “아무 일이나 잘하는 효율성(Do things right)”만을 추구하기 보다는 “정당성을 가진 옳은 일을 하는 것(Do the right thing)”이 중요하다. 특히 성과 측정이 어려울수록 대리인 문제에 따르는 단기 업적주의가 우려되며 따라서 조직의 방향성에 대한 공적인 논의는 필수적이 된다.

외부평가에 좋은 점수를 받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평가 지표가 잘못되었다든지, 높은 득점의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 장기적인 조직발전에 해가 될 수 있다(잘못된 평가지표의 문제점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구 소련에서 공장의 1달 생산목표가 못 10톤이었는데, 29일간 놀다가 마지막 날에 10톤짜리 못 하나를 생산했다고 한다). 대학 입시정책만 봐도 ‘학과제→계열별→학과제→학부제→학과제’의 방향을 밟아오고 있다. 최근에도 ‘의대→의전원→의대’가 진행되고 있다. 당시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였다면 이러한 사태가 가능했을 것인가? 몇 달 전에는 목포대학교의 전 총장이 약대를 유치하기 위한 로비자금을 마련하려고 기성회비를 부당회계처리해 입건되었다. 또한 여수대학교는 200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가 2006년에 전남대학교와 통합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과연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공적 논의의 필요성을 웅변해준다.

물론 학교는 보직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내버려둘 수도 있다. “내 직책에만 충실하고 남의 일은 간섭하지 말라”는 ‘부재기위불모기정(不在其位不謀其政)’적인 윤리의식 때문에, 또는 너무 많은 좌절을 겪어 지쳐서, 혹은 자신의 즉각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일이나 잘 하는 것’보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누구나 정보/능력부족으로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자기가 속한 조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지를 감시해야 한다. 리영희 선생 말씀처럼 “지식인은 사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에서 공론의 장이 활성화 되려면, 구성원의 의식변화가 필요하다. 수동적인 자세, 패배주의, 소아적인 개인주의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최소한의 의무수행을 넘어서서, 조직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조직시민의식(Organizational citizenship)이 충만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사랑과 불굴의 의지가 있는 창조적 소수가 임계질량(critical mass)을 넘을 만큼 우리 대학에 나타나야 조직문화가 혁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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