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 속에서 태어났고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전쟁 속에서 흘려보낸 청년시절, 이후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의 비민주적 행태에 투쟁하며 생애를 보낸 한 남자가 있다. 인권유린을 몸소 체감하고 앞장서 대항해 싸워온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 않던가. 그의 주름엔 젊은 시절의 혈기, 고난, 치열함이 보였다. 지금은 온화하고 인자한 자태를 뽐내는 인권옹호의 대부 이기홍 동문(법학·53)이다.

 

최초의 연속

이 동문은 해남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보자기 들고 등교했다 귀가하면 보자기 던지고 논밭에서 뛰놀았던 초등시절이었다. 3학년 때부터는 공부에 흥미를 느껴 점차 성적이 올라 우등상을 탈 정도가 됐다. 그가 6학년 때 해방이 돼 해방 후 초등학교 첫 졸업생과 중학교 첫 입학생이 됐다. 이후 강진 농림중·고등학교(현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를 거쳐 문리대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대학 법대 최초 입학과 최초 사법고시(8회) 합격자인 것. 이 동문은 “그 당시엔 고등고시 사법과였는데 우리 대학에서 최종 합격자는 나뿐이었다”며 “그 당시를 떠올리면 정말 쉴 때 쉬고 공부할 땐 집중해서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졸업 후 군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하고 5.16군사정변 직전에 춘천 지방 검찰청에서 검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 옳은 게 좋은 것

군정 시기의 검사생활은 현재의 검사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중요한 재판은 군인들에 의한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판결됐다. 그 당시의 검사는 압력을 많이 받았고 법의 집행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엔 어려웠다. 그는 검사 생활을 하다 보니 법전에 나와 있는 정의와 그가 생각하는 정의, 그리고 윗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다름을 느꼈다. 차장, 부장 검사와 자꾸 충돌했다. 그러다 결국 그 당시에는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제주 지방 검찰청으로 발령 나게 됐다. ‘유배인’ 이기홍은 ‘6개월만 있으면 다시 육지로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생활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때 그는 ‘부장검사, 차장검사만 검사고 평검사는 검사도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 상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다고 느껴 사표를 냈다. 그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다”며 정의를 내세웠다.

 

현대사 주요 사건 무료 변론, 소신을 펼치다

그는 2년여의 검사생활을 접고 63년 변호사로의 길을 선택한다. 이 동문은 7,80년대 독재에 대한 민중들의 민주화 투쟁과 열기 속에서 변호사로서 많은 일을 한다. 변호사로서 일반사건(민사)에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긴급조치 위반의 민주계 인사들을 위한 무료변론에 힘을 다했다. 헌법개정, 헌법철폐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나름대로의 민주화운동인 것이었다. 늘 감시 받고,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어왔지만 그는 소신대로 법안에서 인권을 옹호했으며 지켜나갔다. 이 동문은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한 사건인 ‘6·3 사태’와 관련된 사건, 유신 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김남주 시인 등이 관련된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8년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 사건’, ‘5·18 민중항쟁’ 관련사건 등을 거침없이 무료 변론했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이 그러한 사건에 대해 ‘아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료 변론을 했다”는 게 그의 설명.

이 동문이 생각하는 올바른 법조인의 자세는 무엇일까? “법조인이라면 국민들이 편안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일조해야 하지요. 사회 정의 실현과 인권 옹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온 몸으로 기억하는 5·18

그는 5·18 민중 항쟁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1980년 당시 광주지방변호사협회 회장을 맡게 됐고 엠네스티 지부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주변에서 5·18의 처참한 현장을 전하고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롯데백화점 근처에 있던 터미널 앞에서 젊은 사람들을 물구나무 세우고 때리는 것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홍남순 변호사,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등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태의 수습과 진정을 하려했지만 계엄군과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광주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전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몸으로 막자’는 생각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7일 무차별적인 발포를 막기에 그들은 너무 무기력했다. 그는 5·18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5·18은 신군부가 정권 획득을 위해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은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였지만,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의 전통과 끈기를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5·18이 일어나기 한 달 전, 군 관계자로부터 ‘이기홍 변호사는 6개월간 피난 가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5·18이 일어나고 난 후에 그 말을 되새겨보니 5·18은 신군부에서 미리 짜둔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도 최후의 보루는 ‘전남’이었고, 끝까지 투쟁하는 곳이 ‘전남’이었다”며 “신군부는 정의감이 넘치고 끈기 있는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만들어 정권을 잡는 데 이용했다”고 전했다.

신군부의 시나리오에서 이 동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감금됐다. 5·18 직후 상무대로 끌려가 영창에 수감됐다. 죄목은 ‘내란죄’. 속옷만 입혀놓고 보안대 지하 영창에 감금됐지만 ‘거짓 진술을 할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나중에 사면을 받긴 하지만 그 당시에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간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후 이 동문은 96~98년까지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5·18 관련자들의 행동에 아쉬움을 내비쳤다. “5·18 관련자들이 옛날만 돌아보고 자기주장만 해서 단결이 되지 않는다”며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진정한 5·18정신을 계승해 전국적·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했다. 내부의 체면만 생각하지 말고 넓게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변호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야운동과 학생운동 등으로 법적 조치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민주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변론하였고 인권옹호를 위해 힘쓰며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변호사로서의 본업을 충실히 마무리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꾸준히 성실함 갖춰야

“인생은 마라톤인데 한 때 어렵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잘 나간다고 해서 너무 달릴 필요도 없다. 꾸준하게 열심히 자기 목표한 바를 위해서 노력하면 대성할 것이다.” 인생은 반드시 기회가 오는 법이니 성실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 정진하면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동문은 “목표를 잘 세우고 그 분야에서 20년만 노력한다면 대가가 될 것이다”며 “항상 본인이 해낼 수 있다는 맘가짐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이기홍은 ▶1933년 해남 출생 ▶1953년 법과대학 입학 ▶1957년 제 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59~60년 육군 제1사단 법무참모 ▶1961~63년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광주지방검찰청,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1963년 전남대 법과대학 동창회장, 변호사 개업 ▶1966~67년 전남대학교 총동창회장 ▶1967~72년 신민당 전남도당 인권위원장 ▶1972~88년 광주 YMCA 이사 ▶1980년 광주 지방변호사회 회장, 광주민주화운동 재야측 수습위원 ▶1984년 광주구속자협의회창립 준비위원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전남본부 상임공동의장 ▶1991~95년 전남도의회 의원 ▶1996~98년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이사장 ▶199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현 광주 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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