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아파트 뒷자락에 펼쳐진 운암산에 오른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이즈음의 산은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시절이다. 뾰족하던 소나무 잎새도 황갈색으로 수북히 쌓여 있으면, 야윈 산길을 덮어주는 따스한 이불처럼 느껴진다. 제 한 생을 살고 스스로 뿌리로 돌아가 나무의 다음 생을 마련해 주는 나뭇잎. 그래서 산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살며 스스로 풍요롭다. 야산의 가을은 열정으로 타오르는 단풍나무 숲이나 은행나무의 황금길, 은백색 물결을 이루는 억새밭과 같은 비장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댓잎이며 마삭줄과 같은 넝쿨 식물들의 암초록, 담황색을 띄기 시작한 아카시아 이파리와, 밤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잎새들의 황갈색, 주홍색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너그러운 화가가 그려낸 수채화 같다. 호연지기를 꿈꾸는 자, 고산준봉을 오르겠지만, 자연이 베푸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는 이만한 야산으로도 족하지 않나 싶다.
산에 들어설 때는 마감해야 할 원고라든지, 만나야 할 사람 등 나름대로의 생각거리가 있게 마련이지만 솔잎 냄새, 낙엽 냄새, 젖은 흙 냄새 같은 숲의 향기를 느끼는 순간 머리는 가뭇없이 비워지며, 몸이 원하는 대로 신선한 공기만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만 몰입하게 된다. 예전에 항암 치료를 받던 어떤 이가 오로지 숲의 냄새만이 메스꺼움을 잠재우게 했다더니, 인간이 만든 향수가 육신의 감각을 깨우고 관능을 자극하는 향기를 가졌다면, 자연이 만든 숲은 감각에 평화를 주고 심신을 치유하는 향기를 지니지 않았나 싶다.
산에 오르내리며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운암동 인근의 사람들. 한 번쯤 건강의 경계 경보를 받아 보았음직한 사오십대의 중장년 층들이다. 동서남북으로 뚫린 운암동의 도로 사이로 용케 한 등성이씩 살아 남아 130미터의 나지막한 정상을 이루고 있는 이 조그만 야산이 주는 치유와 위안!
나는 이 작은 녹지를 보존함으로써 뭇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이 야산의 주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명심보감에서 이르기를 “돈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기더라도 반드시 자손이 다 잘 지키지 못할 것이요,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기더라도 반드시 자손이 다 잘 읽지 못할 것이니, 남몰래 베푸는 덕을 은연중에 쌓음으로써 자손을 위하는 공덕만 같지 못하니라.”라고 했으니, 자자손손 잘 될 거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재산권을 묶는 것이 얼마나 도덕적인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사들여 녹지를 유지하는 길일 것이나, 몇 달 전 기사화된 운암산 근린공원 주차장 부지 사건(광주시가 주차장을 만든다고 주차장 부지의 열일곱 배나 되는 모 정치인의 땅을 사들였다가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 주차장 건립을 미룬 일)에서 보듯이, 행정 기관이란 정부나 권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 데다가, 개발 의욕이 앞서는 일이 많아 공익 창출의 의지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소음벽 역할을 할 만큼 숲이 깊지 않아 도로의 소음을 견디면서 산새를 키우고 있는 운암산. 그 조그만 야산의 몸통이 근린공원 조성이라는 명목으로 깎여 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도 100년 넘은 역사를 지닌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처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같은 시민단체가 신뢰를 얻고 뿌리를 내려 시민의 힘으로 확보된 재원으로 자연환경을 지켜낼 수 있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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