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올해는 특별한 해라고 하겠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광주항쟁 30주년이 되기도 하지만,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한민족이 일본의 노예가 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인 것이다. 우리 정부와 국민은 새삼스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지 조용히 지나간 것 같다. 다행스런 일은 금년 5월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200여명이 각각 서울과 동경에서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은 무효’라는 성명을 동시에 발표한 일이다.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 황제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는 것이다. 극히 일부의 일본인이지만 이렇게나마 공개적으로 모국의 과거 행위를 무효이고 불법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한일관계의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적인 의미에서는 일본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거의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65년 우리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한일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에서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하였다. 1965년 당시에는 ‘원천무효’(null and void)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일본의 강제병합과 식민 지배에 대한 진실 규명이나 반성은 없었다. 그 결과 추가적인 해석규정이 없어 ‘이미’라는 구절을 싸고 한국과 일본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 각각 자국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체결과정에서부터 주권자인 국왕을 배제하고 일방이 강요하는 조약문에 강압적으로 체결하도록 하였고, 심지어는 국왕의 서명과 조인(국새)도 없는 허위의 문서라는 것이고, 일본은 승전국 미국과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비로서 구 일본체제의 영토에 관한 모든 조약과 법령이 효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36년간만 받았는가. 우리가 일본의 굴레에 들어간 것이 1910년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뮤지컬 ‘명성황후’로 과거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1895년 10월 8일의 비극, 을미사변은 한일병합 보다 15년 전에 일어났다. 일찍이 근대역사에서 그렇게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굴욕을 받은 예를 찾기 쉽지 않다. 한 국가의 왕후가 자신의 궁전 침실에서 일단의 외국 깡패와 민간인 무리 몇십명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되고 시신이 모욕받고 처참하게 버려진 일을 당한 나라가 과연 ‘국가’라는 이름을 걸칠 수 있을까.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하다가 날로 더해가는 일본의 핍박에 지친 국왕은 4개월 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세자와 함께 담 넘어 이웃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만다. 왕족만 비극을 맞은 것이 아니다. 1894년 동학운동으로 촉발된 청일전쟁과 그로부터 10년 뒤 노일전쟁 또한 주된 전장이 한반도였다. 이 땅의 백성들이 당한 고초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수호조약을 통해 독립국으로서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고 하지만, 열강이 본격적으로 각축을 벌이자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은 실제로는 당시 국제법상의 ‘국가’도 아니었고, 근대법상의 ‘인간’도 아니었다. 물론 일본 만화와 소설, 그리고 음악 등 문화를 친밀하게 접하는 젊은 사람들에겐 아득히 먼 옛날이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시대이겠지만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인류의 역사인지 모르겠다. 두 번 다시 그런 역사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텐데 과연 우리는 그러한 의지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