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작은 화분을 선물받았다. 금빛색이 나는 소국이다.
책상 위에 놓인 그 작은 화분을 몇차례 물끄러미 쳐다보다 난 그만 타임머신을 타고 말았다. 30 여 년 전 ‘국화 옆에서’ 라는 시를 배울 때,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 때로 훌러덩 미끄러진 것이다. 거기에서 국화는 40대의 완숙한 누이를 말하는 것이라 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40대가 되면 완숙이 되는 건지, 그 당시 그 40대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져 현실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난 그냥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기에 40대의 나이든 그 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느 정도 자기 생에 책임을 질 나이인 그 40대가 두려워 이해하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그렇게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었던 그런 상황이, 그 30여 년 전의 그 순간이 지금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것이었다.
멍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치 홍길동이가 축지법을 써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쉬운 말처럼 세월은 그렇게 유수와 같이 흐른 것이다. 그 흐른 세월 속에서 나는 무엇을 했고 또 어떻게 살았는가! 과연 나는 그 40대의 완숙을 이루었는가. 지금의 내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거울을 찾았다. 겨우 손바닥만한 거울에 나를 내밀어 보았다. 모처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누이같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젠 그 40대도 아닌 50대를 눈 앞에 둔 내가...
그런데 나는 ‘내 누이같은 내’ 모습에서 나의 어머니를, 나의 아버지를 볼 수 있었고 나의 친구도 볼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올 여름은 정말 더웠다. 한창 더울 때는 여름만 계속될 것 같았다.
이 금빛나는 국화도 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누이 같은 꽃’은 이번 가을엔 볼 수 없으려니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작은 국화가 더욱 반갑고 예쁘다.

전화를 해야겠다. 고향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상하이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1년 넘게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 금빛나는 작은 화분을 햇볕이 드는 창가로 가만히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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