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는 비어 있다. 대나무가 비어 있는 것은 세찬 비바람을 속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비울 수 있기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그 속 넓은 마음으로 바람을 껴안고 하루에 한 길 정도로 자란다. 굴곡 많은 세상에서 직선을 지향하는 대나무는 대쪽 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속을 보이며 세상과 공유한다. 조용하면서 꼿꼿한 대나무와 같은 삶을 산 한 언론인이 있다. 바로 우리 대학 이훈 동문(국어국문 61)이다.

독서와 글쓰기에 빠지다
이훈 동문은 광주 대촌동 칠석리에서 태어났다. 초, 중교시절부터 소설과 시에 관심이 많았고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해 광고타임스라는 월간 신문 제작·편집에 관여했다. 또 고등학교 2,3학년 때는 1년에 한 번 발행되는 교지 편집도 했다. 고등학생부터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에 빠져 몰두하게 된 것이다. “그때는 전후라 책을 구하기가 참 어려웠지. 청록집이나 백록담, 화사집 같은 시집을 구해서 보게 되면 일일이 베껴 적어 놓고 보고 그랬어. 그렇게라도 책을 보는 게 너무 좋더라고.”
61년 이 동문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6월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한 선배가 대학신문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책을 보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던 참에 잘 됐다 싶었다. 이후 그는 대학신문에 젊음과 영혼을 바친다. “강의는 듬성듬성 가서 듣고 책으로 홀로 공부하곤 했었지. 내겐 오직 전남대학신문이 최우선이었어.” 그의 이런 열정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보사 기자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그는 “그 당시 학보사의 영향력은 상당했다”며 “모 대학 학생회장 선거 때 부정선거를 잡아내 재선거를 시킨 일”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고 했다. 이 동문은 전대신문의 초대 학생 편집장이다. 그때 대학신문은 교수가 편집국장을 맡고 대학원생인 전임기자, 그리고 학생기자로 구성됐는데, 하도 열성을 보이니까 편집장(지금의 학생 편집국장) 자리를 만들어 초대가 된 것이다.

글쟁이는 운명, 진짜 기자가 되다
이 동문은 65년 2월 25일 대학 졸업 후 십 여일 뒤 군에 입대 한다. 군대는 사단 정훈 참모부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전우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군에서 생활하면서도 학보사 기자 로 지냈던 시절이 머릿속에 지워지질 않더라고. 그 때 노력했던 것들이 군에서도 많은 도움이 됐어.” 군 생활과 국방부 전우신문 기자생활을 하다 보니 3년이라는 시간은 훌쩍 지났고 전역을 하게 된다. 그는 신문기자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에 들어갔다. 그의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성격은 신문기자 생활에도 딱 맞았다. 삶은 그야말로 치열했다.
그는 88년 광주일보의 자매지인 월간 ‘예향’이라는 잡지의 편집국장이 된다. 이 동문은 예향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3만5천부라는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다각도로 심층 분석했다. 단순한 보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의 발전을 위해 제대로 된 비판을 한 것이다. 예향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 전국적으로 유명한 잡지가 됐고 진보적 인사들의 기고 글이 많이 실리곤 했다. “전남의 농민운동이나 3당 합당 비판 등 당시로선 잡지에서 다루기 힘든 것들을 파고들었지. 정론을 펴고 비판과 감시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 그게 바로 언론이 할 역할이야.”
그는 광주일보에서 ‘예향’국장, 논설위원 등을 보낸 후 언론인 고용지원센터(현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사무소)에서 소장으로 지냈다. 이 동문은 이후 무등일보 편집인 겸 주필로 옮겨 언론인으로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기자로서의 연륜과 광주일보에서 10여년 써온 ‘이훈 칼럼’이라는 그만의 시각이 있었기에 언론계 생활을 보람 있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38년의 기자생활, 그에게 기자란 무엇일까? “기자는 공적으로는 분노할 줄 알아야해. 어떤 사안이건 간에 깨어있어야 하고 문제가 있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헤집는 것이 바로 기자지.”

길 위에서 발견한 새 길, 그리고 끝없는 도전
06년에 이 동문은 드디어 반평생 잡았던 펜을 놓는다. 이 동문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특히 광주라는 특수 환경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람도 있었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대목도 많았다. 더러는 과분한 대접을 받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루하고, 숨이 컥컥 막히는 압박감을 느낀 적도 많은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40여년의 세월이 남긴, 그 세월에 벽돌장처럼 쌓인 공과 과, 땟국처럼 엉킨 허물과 가식의 언어들. 이 모든 것들을 털어버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해 바로 길 위에 섰다. 홀로 영광 계마항에서 광양 섬진강하구까지 전남 서남해안 1930리를 걸었다. 그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풍경들을 길동무 삼아 걸어보니 남도 갯길은 요람처럼 아늑하고 때 한 톨 묻지 않은 거룩한 땅이었다. 해안에 흐르는 순수가 아주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에게 하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미세한 흔들림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에게 걷기 여행은 자연을, 땅과 길을 새롭게 발견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큰 눈으로 보게 한 귀중한 시간이었지. 미세한 흔들림은 나에게 수많은 경이로움과 생각을 제공해줬어.” 이 동문은 3개월에 걸쳐 걸은 남도 갯길과 포구의 풍경과 역사,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 등을 지난해 ‘내가 걸은 남도 갯길’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또 이 동문은 남도 갯길을 걸으면서 얻었던 아이디어를 통해 올해 봄 두 달 동안 충무공이 걸었던 전남 내륙지방을 걸었다. 충무공이 걸었던 길을 통해 깨달은, 영웅 사관이나 관 중심론이 아닌 밑바닥에서 희생당했던 백성들의 삶을 재조명해보는 책을 현재 집필 중이다. 이 동문은 “툭 털어버리면 다시 새로움이 나오는 법이다”며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우리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루하루에 힘써 정진해야
이 동문은 “20대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시기다. 하루하루를 금싸라기처럼 알고 살아라.”고 당부한다. 그는 이상론적인 얘기보단 실질적인 조언을 했다. “20대에는 다방면의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며 “대학생 때 동·서양의 고전을 다 읽어라”고 했다. 책 마다 길이 있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귀중한 자양이 된다. 독서는 사고력과 인생에서의 선택의 길의 폭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또 “한자와 영어실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젊을 때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도전을 해보라”며 “사서 고생하는 것은 나중에 반드시 보답이 온다.”고 강조했다.

이훈 ▶1942년 광주 출생 ▶1961년 국어국문학과 입학 ▶1968년 전남일보 기자(현 광주일보) 입사해 97년 퇴사 ▶1997.7~2001.2 언론인고용지원센터광주사무(현 한국언론진흥재단) 소장 ▶1997.8~98.7 방송위원회 광주지역 방송자문위원 ▶2001~2006.7 무등일보 편집인?주필?이사 ▶2000.10 광주광역시문화예술상(문학부문) 운영위원 ▶2001~2005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6.9~2009.8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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