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번의 광주비엔날레를 한 번도 빠짐없이 ‘관광’했었다. 그리고 이번 제8회 비엔날레 전시장을 ‘여행’했다. 관광과 여행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핵심은 생각, 곧 탐구에 있다. 어떻게 생각하고 보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시야의 폭도 넓어진다. 얼마나 볼 수 있느냐에 따라 자신이 이끌려 가는 관광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이끌어 가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역사 속의 나
하나의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두 벽면에 사진들이 배치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똑같은 그림이 ‘병치’되어 있다. 1전시실 세리 레빈(Sherrie Lebine)의 <워커 에번스를 따라서 After Walker Eans>(1981)이다.

▲ 세리 레빈(Sherrie Lebine)의 <워커 에번스를 따라서 After Walker Eans>(1981)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라는 독일 유물론자가 있다. 헤겔 좌파(청년 헤겔학파)로 분류되는 그는 “인간은 먹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통해 유물론 철학을 전면에 올려놓았으며 이후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다.

포이에르바하 이론의 핵심은 ‘감성(Sinnlichkeit)’이다. 감성은 ‘감각(Empfindung)’을 매개로 하지만 사유, 판단, 적극적 해석이 개입된 인간의 인식 능력이다. 감각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대상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감성의 도야에 따라 대상이 변화하게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상은 실재하고, 인간은 거기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근대 경험론이 가진 불가지론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감성에는 “역사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사회·경제적 변화를 통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흔히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실천적 유물론이라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배경이 변하면 대상도 변하고, 그 대상 안에는 인간의 실천이 있다.

처음 <워커 에번스를 따라서>의 병치된 두 사진을 보고, 설치 미술의 한 전형이려니 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이란다. 그때부터 내 감각을 매개로 감성이 작동함을 느꼈다. 레빈은 왜 에번스의 작품을 그대로 복제했을까? 혹자는 인간의 고통을 상품화·미화하는 것에 대한 통찰이라고 하고, 또다른 이는 오리지널과 예술적 자율성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이라고도 한다. 그 의도가 어찌됐든 레빈의 작품에는 배경이 있고,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본 20여 분간 기자 개인의 변화를 맛봤다. 더 포장해서 말하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역사를 썼다. 비엔날레에서 우연치 않게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가 얻어 걸렸다.   

불편한 진실
2전시실에 김한용의 제목 없는 작품이 있다. 청년 이순재가 밝게 웃고 있다. 사진이 하도 많길래 설명을 읽어보니 기존 광고사진들에서 광고문구만 뺀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보니 사진 속 표정이 밝긴 한데 어색하다.

▲ 김한용의 <무제 Untitled>

한참 더 걷다가 4전시실에서 저우샤오후(Zhou Xiaohu)의 <집단 훈련소 Concentration Training Camp>(2007~2008)를 만났다. 사람들을 모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집단 훈련을 하고 있는 영상 작품이었다. 배경 CG 작업을 해놔 얼핏보면 정상적으로 보이나 자세히보면 영상 속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금방 읽을 수 있다.

▲ 저우샤오후(Zhou Xiaohu)의 <집단 훈련소 Concentration Training Camp>(2007~2008)

현대를 이끄는 힘의 논리는 자본이다. 막스 베버(Max Weber)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에서 윤리의 최고선은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이 버는 것”이다. 흔히 자유민주주의의 동반자로 여겨지는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못지 않은 억압을 강요한다. 자본에 맞춰진 체계가 우리의 생활세계까지 식민화할 때 인간은 자신들도 모르게 같은 것을 욕망하고, 같은 것에만 웃고, 같은 것에만 눈물을 흘린다. 제 자신이 선택한 듯 하지만 진정한 자유가 아닌, 고차원적 억압에 짓눌린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 광고 속에 담긴 인간은 너무도 어색하다. 표정, 몸짓 하나하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짓지 않고, 하지 않는 것들이다. <집단 훈련소>의 사람들도 입으로는 밝은 미래를 외치지만 거꾸로 매달린 그들의 표정은 힘겹기만 하다. 그 표정과 그들이 뱉는 말들을 교차적으로 느끼다보면 밝은 미래가 허황된 꿈임을 은연중 알게 된다. 어느새 자본은 모두를 허황된, 그러면서도 똑같은 꿈에 가뒀고, 어색함 속에 살게했다. 자본 앞에 인간은 거꾸로 매달린 존재가 되버렸다. 

승리와 패배, 의식적으로 기억하기
인간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존재다. 다른 생물도 기억이란 장치가 있으나 인간처럼 의식적이지 않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기억한다. 그런데 인간이 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내포한다. 역사는 기억이지만 모든 기억이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역사의 세계에서는 승리의 기억이 살아남기 쉽다. 인간에게 패배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3전시실 최병수의 <찢겨진 이한열 영정 초상화 Portrait of Han-yeol Lee>(1987)는 승리와 패배의 기억을 동시에 표상하는 이미지이다. 이 대형 걸개 그림은 이한열을 승리로 기억하고자 하는 민중에 의해 역사 전면에 드러났고, 이한열의 장례식과 이 후 민주화 운동에 승리, 승리를 위한 열망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하지만 권력은 그 그림을 없애고 싶었다. 이 영정은 두 차례 권력의 습격을 받았다. 권력에게 이한열은 기억하기 싫은, 패배의 기억이었던 것이다.

▲ 최병수의 <찢겨진 이한열 영정 초상화 Portrait of Han-yeol Lee>(1987)

의식적으로 기억하기에 인간에게 기억은 과거임과 동시에 미래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주고, 어디로 나아갈지 가리켜 주는 것이 바로 기억인 것이다. 때문에 패배의 기억에 대한 회피가 능사는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의 <역사적 사진 Historic Photographs>(1994~)은 가치가 있다. 현재 진행형인 이 연작은 관람자의 직접 참여를 유도한다. <역사적 사진: 위로 걷기/기어들어 가기―오스트리아의 독일합병, 빈, 1983년 3월 Historic Photographs: To Walk Onto/To Crawl Into―Anschluss, Vienna, March 1938>(1996/1999)은 굴욕적인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사진을 보기 위해 방수 천을 들추고 기어 들어가야 한다.

▲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의 <역사적 사진: 위로 걷기/기어들어 가기―오스트리아의 독일합병, 빈, 1983년 3월 Historic Photographs: To Walk Onto/To Crawl Into―Anschluss, Vienna, March 1938>(1996/1999)

이 작품은 다소 껄끄러운 참여를 통해 사진을 패배로 여기는 이에게 패배를 기억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힘들지만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유도한다. 더불어 사진을 승리로 기억하는 이에게는 자신들의 승리라는 목적에 어떠한 희생이 따랐는지 상기하게 도와준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