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을 꾼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묘령의 소녀, 긴 생머리에 황홀하게 느껴지는 어떤 체취, 그리고 그미는 말없이 다가 내 입술에 살짝 그미의 입술을 포개었다. 몇 초 동안의 일인지, 몇 분 동안의 일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내 첫 키스였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고도 몇 달 동안이나 그 느낌은 내 입술의 끝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내 뇌세포의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순간순간 온 몸에 전율처럼 번지는 입술 끝의 감촉이고 느낌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황홀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제 시간은 흘러 그 때 꾸었던 꿈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느낌도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다만 그 때 황홀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이 마치 조금 전의 현실처럼 입술의 끝에서 시작되는 전율이 온 몸에 황홀한 촉각과 미각으로 온 몸에 번져든다는 그 느낌에 대한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 때 살아있는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그 느낌에 대한 기억 밖에는 없다. 달리 말해 그것은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느낄 수 없었고, 기억할 수 없는 나의 무의식이자 신비이다.
그래서 꿈은 나 이외의 그 어떤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고, 그 꿈 속에서 일어난 사건과 느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나의 성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꿈에 누군가가 접속해 들어온다. 단순히 누군가가 접속해 올 뿐만 아니라 그 누군가는 내 생각을 조작하고, 꿈속으로 들어와 내 생각을 훔쳐가기도 하고 심지어 내 생각을 조작해서 ‘나’를 바꾸려고도 한다면? 이런 기막힌 상상력이 빚어낸 영화가 바로 <인셉션>이다.
나는 동양철학 그 가운데서도 신비한 우화와 몽롱한 격언으로 가득한 <노자>와 <장자>를 공부한 사람이다. 특히 <장자>에는 기가막힌 꿈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나비 꿈 이야기’(胡蝶夢)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웠는지라 자기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화들짝하고 꿈에서 깨어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의 꿈에서 장주가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나비의 꿈에서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이것이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상 나는 <인셉션>을 보면서 <장자>의 나비꿈 이야기를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장자>의 ‘나비꿈 이야기’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25년간이나 상상하여 이루어 낸 자본주의적 꿈 이야기 사이에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니 나는 상관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보지 못하였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꿈’은 그 스스로 ‘물화’(物化)라고 이야기하듯, 그것은 어떤 몽롱한 변화, 현실이 아닌 변화, 그래서 그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삶에 대한 욕망에 관한 꿈일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현대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전혀 상이한 꿈을 창조해내고 있다. <인셉션>의 무대는 가까운 미래이다. 타인의 꿈속에 침투하여 마치 건물을 설계하듯이 꿈을 설계한다. 그리고 꿈 속에서 타인의 생각을 훔치는 ‘추출’을 감행한다. 심지어 타인의 꿈 속에 침투해 새로운 생각을 심는 것, 즉 ‘인셉션’을 자행한다. 그것이 바로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의 임무이자 능력이다. 물론 그 꿈은 설계된 것이지만 ‘킥’을 통해 깨어나기도 하고 잘못될 경우 꿈의 밑바닥에 갖히는 ‘림보’라는 위험도 있다.
그러나 꿈을 설계하거나 꿈 속에 침투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꿈 속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토템’을 지닌다. 이 ‘토템’은 꿈인지 현실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신호이다. 문제는 이 토템을 통해 다른 사람의 꿈에 침투한 사람이 ‘꿈 속’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꿈 속에 침투한 사람에게는 꿈은 사라진다. 꿈꾸는 사람과 상관없이 침투한 사람은 스스로를 분간하고,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고 의식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셉션>은 꿈에 대한 상상이라기보다 현실의 자본주의적 욕망이 타인의 꿈 속까지 기업 전쟁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현실의 확장에 다름아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셉션>에는 또 다른 하나의 축이 있다. 미국 사회에 침투하여 미국을 허물려는 일본 기업에 대한 적개심이다. 이런 요소는 수많은 허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치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러하고, <로보캅>에서도 그러하다.
나는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토마스와 친구들>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소도어 섬의 토마스라는 기관차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를 다룬 토마스와 친구들. 그러나 그 섬에는 어린 아이들이 상상하기 쉬운 부모님도 선생님도 심지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없다. 오로지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도와주며 일을 하는 토마스와 친구들 그리고 그 섬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 사장님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따르며, 그 사장님은 신처럼 선하다.
근대를 비판했던 푸코는 파놉티콘을 통해 새로운 권력의 양식을 고발한다. 마치 죄수들은 전혀 감시인이 보이지 않지만 24시간 감시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스스로 규율하게 되는 죄수의 처지가 곧 현대 사회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기제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성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제 그 죄수들은 잠자는 시간동안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도 하는 그런 꿈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
박진감 넘치는 수많은 장면들, 상상을 조소하는 듯한 새로운 연출을 통해 숨가쁘게 조여오는 놀라운 특수효과들은 가히 볼 만하다. 그러나 놀란의 세계에는 한 가지가 빠져있는 듯하다. <블레이드 런너>에서 인간이 아닌 복제인간 리플리컨트가 오히려 인간을 구하고 스스로 죽으면서 ‘휴머니티’를 조롱하는 그 아찔함!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제 인간의 유일한 탈출구인 ‘꿈’의 세계, 현실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몽롱한 중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꿈’마저 자본주의의 욕망에 포로가 되어가고 있음을 고발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꿈 꿀 수 있는 일탈의 공간속에서 우리가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인간’의 꿈,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적 꿈’, 우리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지 모르겠다. <인셉션>을 보고나니 이제 나도 잠이 들까 두려워진다. 혹시나 꿈을 꿀까봐! 혹시 오늘밤 내가 꿈을 꾸더라도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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