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희 기자 shdream@gmail.com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 본명 Terence Francis Eagle-ton)은 영국의 공업도시인 맨체스터 샐포드(Salford) 출신의 맑시스트 문학비평가다. 1967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한『셰익스피어와 사회』를 출간하면서 영문학계에 공식적으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문학비평과 소설, 자서전, 정치비평, 방송대본, 에쎄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40여권이 넘는 저서를 발표해온 그가 최근에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독자를 확보한 그의 학문적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일단 영국의 인문학계에서 가장 도발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맑시스트 문학비평가로 소개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석학’보다는 악동(惡童)에 가까운 이미지가 더 강하게 각인된 그의 학문적 이력에서 두드러지는 전환점으로는 1976년에『뉴 레프트 리뷰』지면에서 자신의 스승인 레이먼드 윌리엄즈를―그가 공격한 선배학자들은 한둘이 아니지만―가차 없이 비판한 ‘사건’을 꼽아야 할 듯하다. 이후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유명세를 탄『문학이론입문』(1983)의 출간으로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다양한 비평이론을 쾌도난마하면서 새로운 노동계급문학의 가능성을 피력한 이 저서를 통해 일약 스타비평가로 떠오른 그의 이력에서 주목해야 할 또하나의 변곡점은, 68혁명 세대로서 깊은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급진적 철학자인 루이 알뛰세르와 거리를 두는 시점이다. ‘부친살해’라는 비난을 받은 레이먼드 윌리엄즈 비판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평문이 바로 그때 나오기 때문이다. 즉 1988년에 같은 지면인『뉴 레프트 리뷰』를 통해 선배 맑시스트의 업적을 부당하게 깎아내린 문제점을 부분적으로(만) 성찰하는「희망의 여정을 위한 자원: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중요성」을 발표하면서 진보적 비평가로서 새롭게 출발한 것이다. 그 이후 기존의 전통을 과감하게 뒤집는 전복의 사상가라 할 만한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해왔다.
   2000년대 들어 거의 매년이다시피 저서를 내는 왕성한 필력이지만 이 소개글에서는 이글턴이 근년에 소위 종교과학논쟁에 뛰어들면서 일으킨 ‘논란’에 대해서만 몇마디 하고자 한다. 마침 전남대학교에서 강연한 주제가 바로 그 논란과 직결되니, 강연문인「신념과 근본주의」를 소개하면서 그의 문제의식을 부각시키는 것이 좋겠다.

▲ 지난 9일 열린 테리 이글턴 교수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이 강연을 듣고있다.

  「신념과 근본주의」는『성스러운 테러』(2005),『이방인들과의 갈등: 윤리학 연구』(2008),『이성, 신념, 그리고 혁명』(2009),『악에 대하여』(2010) 등에서 이글턴이 전방위적으로 천착한 종교윤리 문제를 간명하게 집약한 글이다. 그가 보기에 9?11테러 이후 서구지성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지식인은―국내애서도 번역되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와『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필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이다. 그는 두 인물을 묶어 ‘디치킨스’로 명명하는바, 그가 비판하는 논점은 과학과 이성의 무오류성을 맹목적으로 앞세운 무신론적 입론에 내재한 지식인의 무책임과 반지성주의다. 말하자면 “망원경과 현미경 덕분에 [종교]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중요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식의 디치킨스적 과학주의가 얼마나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러나「신념과 근본주의」의 종요로운 통찰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슬람과 기독교를 포함한 일체의 과격한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디치킨스적 과학주의와 닮은꼴인가를 지적하면서 ‘신념’을 내세운 대목이다.(그는 이 논제를『이성, 신념, 그리고 혁명』에서 특히 통렬하게 파헤친 바 있다.) 모든 종교적 불확실성을 배척하는 근본주의와 모든 신앙을 불신하는 과학주의는 본질적으로 한배에서 나온 쌍생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쌍생아의 문제는 믿음으로 환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즉,

어떤 이는 너무 믿고 또 어떤 이는 너무 믿지 않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양쪽 진영 각각이 상대가 존재하도록 거드는 것이 문제다. 신념을 잃고 신을 인식할 수 없을수록 서구는 더 물질적 이익에 빠져들어 물질적 이익을 향한 이런 병적인 충동이 다른 국가들을 짓밟는 결과를 야기하면 할수록, 서구는 점점 더 비타협적 정체성의 형이상학을 상대편 나라에 만들어낼 것이다. (강연문 9면. 졸역)

과연 그렇다.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식의 근본주의가 판칠수록 바로 그런 근본주의에 대해 근본주의적인 테러를 감행하는 악순환이 9·11테러 이후 전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도 남과 북이 대치한 한반도 및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남한사회 내부의 악순환을 연상하게 되지만 아무튼 이글턴은 자살폭탄테러를 부추기는 이슬람의 원리주의에 대해서 신랄하다. 동시에 기독교가 미국적인(=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세속화되는 양상에도 사정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와 과학주의적 무신론의 ‘동침’이 불러온 이 난세에 대한 그의 처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예수의 사랑(Love)과 사실상의 동의어이면서도 이성과 배치되지 않는 신념(faith)이다. 없다면 죽은 목숨이요 있어도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다. 이런 진퇴양난의 사랑은 그리스토신앙의 가장 근원적인 곳에 자리잡은 신념을 통해 현시된다. 이글턴은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고문과 조롱을 받는 정치범”의 상(像)에서 읽어낸다. 그는 예수가 활동한 당시 정치범만이 십자가형을 받았음을 환기하는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둠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몸부림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이유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변혁적 힘의 약속에 대한 신심을 잃지 않는” 정치범들이야말로 오늘날 신념의 구현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의 구현이 지구화시대의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든 헐벗은 자들을 통해 진정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비극적 인본주의자’로서의 이글턴의 도덕적 용기에 공감하는 청중은 한국에서도 적지 않았으리라 본다. 나는 이글턴이 문학비평가로서 물음의 형식으로 행한 또다른 강연문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이견을 품고 있지만 은행잔고의 안정감과 이윤의 환상이 종교를 대체해버린 이 혼돈의 시대에 그가 역설하는 신념의 의미에 토를 달 생각이 없다. 다만 그가 강조한 ‘faith'를 한국적 맥락으로 번역해볼 필요는 느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혁명적 신학‘을 무리 없이 수용하는 불교를 포함한 우리네 전통종교도 새로이 공부해볼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해불가의 ’신념‘에 의한 행동보다 더 원만한 ’보살행‘이라는 개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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