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의 익살맞은 묘비문은 읽을 때마다 유쾌하면서도 삶을 추스리게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후회하는 일로서 누구나 경험할 만한 것은 아마도 학업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시험이 끝날 적마다, 내일부터는 꼭 수학을 예습, 복습해서 성적을 올릴 것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시간은 훌쩍 지나가 다음 시험 날짜가 이미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는 과목부터 공부를 시작하다 보면, 결국 수학은 또 제대로 준비가 안된 채 시험을 봐야 했다. 수학 공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입시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마흔 살이 넘어서까지 내가 꾸었던 악몽의 주된 레퍼토리였다면 우물쭈물 시간을 보낸 데 대해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우물쭈물하다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일 것이다. 내게는 연세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신 은사님이 계셨다. 명절에만 찾아 뵙다가, 어느 가을에, 무등산에 모시고 갔는데, 무척 즐거워 하시는 것 같았다. 아, 선생님께 필요한 것이, 명절 인사가 아니라 바깥 나들이구나 싶어서, 봄가을의 어느 좋은 날, 꼭 모시고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두 번쯤이나 모셨을까? 우물쭈물하면서 봄, 가을을 보내는 동안, 선생님은 세상을 뜨고 마셨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하고 후회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일은 우물쭈물할 만큼의 여유는 있는, 아주 화급한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다. 바쁘면서 중요한 일은 누구나 다 하고 산다. 바쁘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작년에 TV와 라디오 방송에서 “대한민국 1,000명에게 물었습니다.”하고 시작하던 공익 광고가 있었다.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이며, 해결 방법은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사회의 소외층을 거론하며 일자리 나누기나, 봉사 활동 등의 대책을 내어 놓는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하고 묻자, “마음은 있는데 바빠서요.”, “하려고 하는데 그게……” 등의 대답을 늘어 놓는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제도적 장치’를 언급하지 않고 ‘자발적 나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광고의 태생적 한계라 할 것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우물쭈물 미루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올 봄은 정말 더디게 왔다. 차가운 날씨와 우중충한 비가 연일 봄길을 막는 중에, 한 시대의 스승이 될 만한 분들도 많이 세상을 떠났고, 억울한 죽음들도 있었다. 봄을 다시 맞고, 5월을 다시 누리게 된 우리는 우물쭈물하다가 놓치게 될 것들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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