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에게 30만원 빌려 처음 농사 시작, 

거듭된 좌절과 인고 속에 젊은 농업인으로 우뚝 서

▲ 내 꿈은 탤런트

전남 장흥의 한 시골에서 육남매로 태어난 강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새벽 5,6시에 일어나 소를 치고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 정도로 농업이 좋았다. 그 당시 소년 강용이 꾸었던 꿈은 탤런트와 농부. 그는 "아직도 탤런트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며 "텔레비전에 나가 농업에 대해 이야기 하는 탤런트가 되고 싶다"고 웃음 지었다.

그는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며 어렸지만 “농사를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을 잘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도 하고, “이것으로 부가가치를 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사실 농업이 직업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그냥 농사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를 농고로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에 진학해 농대를 진학했다고. "대학 진학 때도 부모님이 반대했냐구요? 사실 공부를 그 정도로 밖에 못한 것도 있어서 반대하진 않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  악세사리 노점상, 약장사…잊을 수 없는 대학시절

그는 대학에 진학해 '대학생활을 재밌게 보내자'라는 생각으로 많은 일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마케팅과 영업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그는 "마케팅과 영업 분야에 흥미가 있어서 학교 도서관에 있는 관련분야 책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조리 다 읽었다"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또한 다양한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전대 후문 노점상 1호가 바로 강 동문이라는 것. 후문에서 악세사리 노점상을 하고, 선배와 헬스클럽에서 일하기도 했다. 또 약장사, 가구공장 노동자, 가구영업, 햄버거 가게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는 "그 당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무언가 큰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며 "그 때의 경험이 현재 나에게 엄청난 도움과 차원 넘은 마케팅을 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 난 M자가 싫어

대학 졸업 후 강 동문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사를 시작했다. 농업을 하고 싶은데 농업을 몰랐고 무

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던 그 때, 그는 그냥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농업에 몸담았다.

 

그는 우연히 서울에서 아는 선배의 농장에 들렀는데, 그 선배의 비닐하우스 안에 펼쳐진 파란 새싹(무순)을 보고 너무나 와 닿았다고. 그래서 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순무를 기르는 것을 배워 광주로 내려왔다. 농사를 시작할 돈이 없어 그는 친구들에게 30만원을 빌려 광주 근교에 있는 20평 남짓한 비닐하우스에서 무순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학사농장의 첫걸음이다.

무자본으로 시작해 무순농사로 번 하루 매출은 5천원 정도였다. 돈을 벌지 못했지만 새벽 4시까지 무순을 다듬고 포장한 다음 농산물 공판장에 내다 팔며, 하면서 배워나가자는 생각으로 무조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시절에 겪었던 기억에 남는 일이 있냐고 묻자 몇 가지 일화를 말해줬다. 무순농사를 할 때 고시준비를 하고 있던 선배가 강 동문에게 일하는 곳에 와서 거들고 싶다고 말한 것.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양동시장에 납품을 하러 가면서 담배자판기에서 담배 두 갑을 사 한 갑을 선배에게 주자 선배가 "앞으로 너에게 담배 한 가치도 안 얻어 피우겠다"며 "나는 네가 즐겁게 다니길래 돈을 많이 벌고 그런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일을 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또 그 시절 돈이 없어서 빵 한 조각,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티던 때 짱이, 강토라는 개와 같이 자고 먹으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그는 "그 두 마리 개와 함께 지내던 것이 생각나 아직도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 이후 일이 조금씩 늘어갈 무렵 폭설로 인해 비닐하우스가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됐다. 강 동문은 "나는 영어 알파벳 M자가 너무 싫다"며 "M은 비닐하우스가 무너진 모양과 비슷해서 M자를 볼 때마다 그 때의 아픔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 두 명의 대학친구들과 함께 900평의 하우스를 지어 채소들을 무럭무럭 키워오던 때 또 한 번의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M자 모양이 돼 좌절을 맛보게 했다. 거듭되는 좌절로 그는 농업을 포기할까 망설이다 그는 다시 한 번 비닐하우스를 짓고 채소를 키우게 된다.

그렇게 좌절과 시련을 넘어 강 동문은 지금의 학사농장을 일궈냈다. 현재 학사농장은 전남 장성에 직영농장을 두고 유기농산물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또한 상무지구에 소비지 밀착형 직판장인 유기농타운을 운영해 창고형 상자 진열 판매를 실시하며 판매가격을 낮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유기농타운 2층에 국내 최초로 친환경농산물 전문식당을 운영해 잉여농산물과 식품의 판로를 창출하고 있다.

▲ 시련을 넘어 전국 최고의 농업인이 되다
그렇게 좌절과 시련을 넘어 강 동문은 지금의 학사농장을 일궈냈다. 강 동문은 대학을 졸업한 학사보다 “항상 배우면서 일하자”는 다짐으로 학사농장이라 이름 지었다. 현재 학사농장은 전남 장성에 직영농장을 두고 유기농산물을 생산,가공,유통하는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또한 상무지구에 소비지 밀착형 직판장인 유기농타운을 운영해 창고형 상자 진열 판매를 실시하며 판매가격을 낮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유기농타운 2층에 국내 최초로 친환경농산물 전문식당을 운영해 잉여농산물과 식품의 판로를 창출하고 있다.
학사농장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 남다른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소비자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벌레가 못 먹는 것은 사람도 못 먹는다”라는 생각으로 유기농산물을 다품목 소량 생산으로 소비자들의 선택 폭을 넓혔다. 또 소비자와 함께하는 현장교육, 체험학습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재 약 1만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회원소식지 ‘숨쉬는 땅’을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홈페이지(www.62farm.co.kr)를 개설해 유기농업과 유기농산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6월2일을 “62day(유기데이)”로 정하고, 12월에는 김장축제를 개최하는 등 소비자와 함께 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한 강 동문은 일반적인 유기농 매장이 본 기능을 잃고 부수적인 것에 신경 쓰는 것을 염두해 뒀다. 따라서 그러한 부수적인 것들은 빼고 좋은 유기농 상품을 적합한 가격으로 파는 것에 중점을 둬 “유기농 제품은 비싸다”라는 편견을 없애는데 노력해왔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2008년 한국 농업분야의 노벨상인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최근 유기농산물을 싱가폴로 수출키로 해 또 한번 화제를 모으며 한국 유기농 발전의 선도 역할을 하고 있다.

▲ 고정관념을 깨라

강 동문은 사람들이 농업에 대한 과장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자신은 농업을 농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설파했다. 농업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적은 땅에서 어떻게 많은 매출을 올릴 것인가를 생각했고 그것이 지금의 학사농장을 만들어 냈다는 것. 그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고정관념,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사람은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다면 사람은 발전할 수가 없다"고 피력했다. 또한 "안일한 마음과 안주하는 마음은 한 가지만 해서는 안 되는 요즘 세상에서 버티기 힘들다"며 "학교 다닐 때 많은 일을 경험해보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면 한다"고 그의 생각을 전했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