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의 4분의 1이 보았다는 영화 아바타를 두고 신문과 인터넷에 아바타에 대한 여러 가지 평들이 즐비하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바타의 내용이 대단히 감동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가히 혁명이라고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새로운 영상기술의 승리와 쾌거를 보여준 대작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아바타를 두고서 뻔한 스토리를 화려한 영상으로 눈가림하려는 헐리우드식 사고가 역겹다고 혹평하기도 하는 것 같다. 호평과 혹평이 뚜렷하게 갈리는 것으로 보아 아바타가 대단하기는 대단한가 보다. 3D입체 상영관에서 아바타를 본 후 여러 가지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보고들이 심심찮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아바타의 영상기술을 과히 혁명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모든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영화 아바타가 800만의 관객을 동원한 힘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은 개운하게 가시질 않는다.
3D에서 4D로 영상기술이 진화하게 되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가상적 현실을 현실 세계에서도 똑같이 느끼게 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속 무대가 아마존 정글이면, 관객도 마치 아마존 정글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무덥고 습한 기운을 극장 안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영상 속에서 차가운 눈발이 휘날리면 칼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도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현란하고 스펙타클한 CG기술의 승리와 진보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경이로움과 짜릿함을 느끼기 보다 이 새로운 영상기술의 목도 앞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불편함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현실 보다 더 현실적인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이미 상당부분 잠식해 버렸다는 두려움 말이다. 실감나는 아바타의 영상에 환호하는 800만의 관객이 혹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맞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숫자를 입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야말로 이 공포감의 근원이다.
인간은 언제, 그리고 어떠할 때 가상과 현실을 맞바꾸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현실이 가상만 못할 때, 그래서 현실이 보잘 것 없고 초라하거나 혹은 너무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출구를 현실 속에서 찾지 못할 때이다. 현실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형편없어 보일 때, 현실이 너무나 권태롭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때, 인간은 주저함 없이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출구로 몰려들게 되어 있다. 가상의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그 짜릿함과 즐거움을 현실 공간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리만치 현실 속의 내가 무력하다면, 굳이 현실에 목매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바타 흥행의 원인은 여기에 있어 보인다. 800만의 관객은 현실공간 속에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향해 주저함이 없이 가상의 세계로 몰려든 숫자를 입증한다. 여기에는 현실 속에서 맛보지 못한 흥분과 스펙타클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즐기라!’고 명령하는 초자아인 셈이다.
영화가 매체로만 간주되었던 20세기까지, 영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 세계의 부조리함을 성찰할 수 있게 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한 현실의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길어올 수 있는 동력일 수도 있었던 반면, 영화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는 영화를 통해 더 이상 현실의 변혁이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나의 욕망을 또 하나의 세계로까지 비대해져버린 가상의 공간 속에서 해소시켜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엽, 새롭게 등장한 영상기술의 목도 아래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정치의 예술화’에 맞설 것을 주장했던 벤야민(W. Benjamin)의 통찰이 무색하게만 여겨지는 것도, 그리고 아바타가 선보인 새로운 영상의 혁명을 마냥 환호할만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철학자 니체(F.Nietsche)는 진보의 시대에는 늘상 거칠고 강제적이며, 쓸어버릴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떨어진 정신들이 간혹 나타나곤 한다고 한다. 이런 정신들은 인류의 지나간 단계를 다시 불러내려고 애씀으로써 그들이 저지하려는 새로운 방향이 아직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고, 이 새로운 방향에는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진정 진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방향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큰 흐름의 강줄기를 거슬러 가는 이 뒤떨어진 정신들과의 공정의 결과일 뿐이기에 우리는 반작용에서 진보할 뿐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진보관을 일단 수용한다는 전제 아래 잠시 영화 메트릭스를 떠올리며 내기를 해보자. 여기 두 개의 알약이 있다. 첫 번째 알약은 나를 가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약이다. 이 약을 먹으면, 나는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했던 모든 일들로부터, 더 나아가 권태로운 일상의 현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내 아바타가 나를 대신하여 수업에 참석하고 시험을 치러주며 레포트를 작성해준다. 힘든 일은 모두 아바타의 차지이고 나는 아바타가 활동하는 동안 그저 편히 쉬면 된다. 두 번째 알약은 나를 현실 속에 머무르게 할 뿐 아니라,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도록 한다. 현실은 견디기 힘든 삭막한 실재의 사막이다. 기꺼이 현실 속에서 머무르면서 권태, 스트레스, 힘든 노동을 견뎌내야만 한다. 자, 당신이라면, 혹은 아바타를 봤다는 800만의 관객이라면 과연 어떤 약을 선택할 것 같은가? 첫 번째 약일까, 두 번째 약일까? 다시 말해서 진정한 진보를 추동시킨다고 니체가 말했던 그 ‘뒤떨어진 정신’마저도 가상공간에서 활약하는 나의 아바타에 불과하다면 그땐 어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영화 아바타를 읽는 나의 방식이다. 요컨대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얼마나 실감나게 똑같이 재현해 주는가가 아니라, 대상 a를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하기만 하는 바로 이 욕망이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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