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아니 밤을 지샐 작정이었다. 내가 집을 떠나다니! 동계산행은 내가 산악회에 들어와 정식으로 가는 첫 산행이었고 내 일상과 처음으로 떨어져 있어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가기 전, 진통이 꽤 있었다. 여자로서 그런힘든 산행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들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들은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동아리 선배 석민이형은 그러한 일들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게 "처음엔 부모님의 명령이 답답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답답해져 올거다. 그걸 깨야한다." 사실 이미 그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부모님께 떳떳하게 말 한마디 못하는 내가 답답했고, 말 한마디 못하게 만들었던 평소의 내 생활태도가 답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은 허락을 해주었다. 처음엔 그렇게 반대하시다가 막상 가기되니 걱정이 되셨는지 이것 저것들을 챙겨주시고 등산에 대해 잘 아는 친구까지 초빙해서 이런저런 주의사항들을 숙지시켜주셨다. 주의사항보단 자신이 가본 산에 대한 자랑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배낭을 팩하면서 조심히 다녀오길 바라는, 날 사랑하는 그 마음들도 잊지 않고 넣었다. 덕분에 배낭은 이삿짐마냥 뚱뚱해졌고 그렇게 순천에서 광주를 향하는 6:10분 버스를 탔다. 헌주형과 강릉행 버스를 함께 타고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배웠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엔 주변의 핸디캡적인 부분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그 아름다운 도전이 좋은 결실(한의사국가고시 합격)까지 맺게 되는 헌주형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과감함과 도전정신이 변화가 두려운 한 여학생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또한 7번국도가 너무나 아름다운 길이라는것을 처음 알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7번국도 어느 한구석에 바다가 잘 보이는 큰 창이 달린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얀 파도 조각, 갈매기, 빨간 등대, 수평선. 난 넋을 잃었고 헌주형은 그 모습이 흐뭇하셨는지 창문에 좀더 가깝게 붙어서 보라며 창가쪽 자리를 내어주셨다. 도착해서 만난 선발대원들은 한마디로 참 딱한 모습들이었다. 뭔가에 굶주린 것 같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별 훈장이 하나씩 달려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음날 드디어 매바위자락에 차가운 해가 밝았다. 눈밭위에서 맞는해와 흙위에서 맞는 해는 분명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다. 꿈틀꿈틀 발끝이 시려온다. 난 사실 산악회가 이런 곳인줄은 몰랐다. 그저 가벼운 배낭을 메고 다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절경의 산들을 함께 다니는 것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랬다. 현실을 직시하자 차가운 빙벽이 눈앞에 있고 성근이형은 종전엔 볼수없던 자상하신 얼굴로 빙벽을 피켈로 찍으라 하셨다. 헌주형은 찍었으면 아이젠으로 딛고 올라가라고 하셨다. 찍고 딛고 오르고 찍고 딛고 오르고를 수번 반복하고 나니 손등은 장갑을 껴도 살얼음이 되어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연습하고 나니 이제 정말 더이상 올라가기도 무섭고 내려가기에도 무섭울 만큼 올라와버렸다. 우는 모습이 이쁘지 않은 나. 20년 남짓한 내 인생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처절한 몸뚱이만이 서바이브를 외치며 빙벽과의 물아일체를 힘주어 고수하고 있었다. 한참을 대기하고 있었던것 같다(내겐 짧게 느껴진 시간이었지만). 한참을 대롱대롱 자일에 의지하다가 가능성이있는 얼음위면 눈 딱감고 올라갔더니 목표지점에 다다랐고 오금을 저리면서 하강을 했다. 형한테 '그냥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올랐다고 말했더니 배꼽을 잡고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본 매바위 빙폭은 처음 만났을 때의 낯설음은 아니었지만 극한의 공포를 체험한 나로서 영하의 얼음덩이가 나와는 영영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매바위에게 노래를 불러준, 그래서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가 된 날이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매바위 빙폭등반은 끝이났다. 빙폭하는동안 웃은 적이 없었다. '다음 해에 오게되면 꼭 웃는 모습만을 보여줄게!'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매바위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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